[사진공책] 가려진 세계의 징후들

비렁길을 걷다 본문

- 찍고, 쓰고

비렁길을 걷다

김창길 2015. 3. 19. 15:15

 

 

 

황금 거북이란 뜻의 여수 '금오도'는 검게 보인다해서 '거무섬'이라고도 불렸다. 여수 앞바다에 떠오른 거북이 모양의 섬이 녹음 짙은 빽빽한 나무들로 검게 보여서 그리 불렀다. 나무 잘 자라는 섬은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사람들의 입섬을 금지하고 궁궐 건축재로 사용하기 위해 목재를 키워냈다. 나무 벌채를 금지한 산을 '봉산'이라 불렀는데, 금오도는 소나무 목질이 좋아 '황장봉산'이라 불렀다.

 

품질 좋은 목재 생산기지였던 금오도에 사람이 들어가게 된 건, 불과 120여년전. 태풍으로 섬의 소나무들이 쓰러지자 금오도는 봉산에서 해재돼 일반인들의 개간이 허가됐다. 튼실한 목재를 자랑하던 아름드리 나무였을텐데, 그 위풍당당한 줄기를 꺽어낸 조선 말기의 태풍의 기세가 궁금하다. 여하튼, 사람을 못살게 할줄만 알았던 태풍은 금오도에 사람이 살게 만들어 준 고마운 태풍이었다. 

 

 

 

비렁길 1코스 미역널방

 

 

이주한 마을 사람들은 산 허리 부분에 오솔길을 냈다. 신작로 사업처럼 부역을 동원한 기간사업이 아니라 자연스레 만들어진 길이다. 겨울을 버텨내기 위해 땔감을 구하러 산 허리를 돌아다녔는데, 한 사람 두 사람 밟던 땅이 줄이 이어져 길이 열렸다. 두포, 직포, 함구미 등 여러 마을을 잇는 이 산길은 아찔한 벼랑과 자주 마주친다. 벼랑길, 전라도 사투리로 비렁길이다.

 

하늘이 무심해 첫 날 금오도에 들어가지 못했다. 남해 땅끝 백야 포구의 작은 매표소에는 기상악화로 배 운항이 중단됐다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8시간이 넘는 비렁길 전구간을 정해진 일정에 소화할 수 없게 됐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출항한 배는 30여분 걸려 함구미항에 도착했다. 비렁길 1코스가 시작되는 마을이다.

 

 

 

비렁길 2코스 민가

 

 

해가 높아지자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바닷 바람이 제법 봄기운을 전해줬다. 10여분 1코스를 걷자 말 그대로 벼랑이 나타났다. 절벽으로 햇빛이 들어오자 50미터는 족히 넘어 보이는 웅장한 벼랑이 나타났다. 기암절벽인데, 말로만 듣던 '미역널방'이다. 미역을 널기 좋은 바위라 해서 미역널방이라 불렀다는데, 이 절벽까지 힘들게 미역을 짊어지고 미역을 말렸을까하는 의구심도 든다.

 

미역널방을 지나자 민가들이 모여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함구미 마을이다. 입도한 마을이지만 위에서 올려다보는 풍광이 전형적인 다도해의 모습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허탈해하자 엎치락 뒷치락 길을 걷던 노부부가 촌천살인 한 마디를 던진다.

 

"빨리 갈려면 여기 올 이유가 없죠."

 

괜한 연륜이 아니다. 템포를 줄이고, 무심코 스쳐지나가서 못 본 것들이 있는지 주위를 두리번 거린다. 그제서야 남녘의 봄이 보인다. 황토에서는 푸른 새싹들이 돋아 올랐고, 길섶에서는 민들레와 제비꽃이 올라오고 있었다.


 

 

비렁길 2코스에서 만난 동백꽃 사랑고백. 희연이는 누굴까?

 

 

2코스의 시작점인 두포에서는 재맸는 안내판이 힘든 발걸음에 웃음을 안겨주었다. 차 한대가 올라갈만한 길이었는데, 차를 몰고 올라면 먼저 연락하라며 휴대폰 전화번호가 적혀있다. 말 그대로 차 한대만 올라갈 만한 길폭이기에 중간에 맞닿드리면 여간 난처한 일이 아닌가보다. 가파른 언덕을 올라 동백나무가 우거진 숲을 지나자 핏덩이 같이 떨어진 동백꽃이 길으 수놓고 있다. 아니다 다를까, 길 밖에는 동백꽃 사랑 고백의 흔적이 남아있다. 희연이는 누굴까?

 

4시간이 좀 넘었을까, 해안 절벽과 숲길로 이어지던 비렁길 탐방을 직포에서 마무리했다. 서울 가는 시간 때문에 직포에서 배를 타고 나가야했기 때문. 직포 해안을 따라 120여년전 태풍을 견뎌낸 소나무들이 웅장한 자태를 뽑내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옥녀봉에서 베를 짜던 선녀들이 직포 바닷가에서 목욕을 하다가 승천하지 못해 소나무가 됐다는 얘기도 있다. 선녀들은 항상 목욕 때문에 망한다.

 

 

 

소나무가 절경인 직포 마을

 

 

3코스를 못 본게 아쉽지만 발길을 돌렸다. 비렁길이 유명세를 타기 전에는 직포에 배가 닿지 않았다. 3코스의 비경이 몇년전 직포를 다시 열게 만들었다는데, 왜 그냥 가냐며 식당 아줌마까지 아쉬워한다. 직포에서 출발한 배는 금오도 해안절벽을 유람하며 함구미를 거쳐 여수로 향했다. 여수 앞바다는 한없이 푸르렀다.

 

 

여수 앞바다

 

2015. 3. 11. 여수

'- 찍고, 쓰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프리카 사파리, 지옥의 문에 들어서다  (9) 2015.03.27
케냐, No Photo!  (4) 2015.03.22
인도 탈출기  (4) 2015.03.12
학교가 살아났다. 바당이 웃는다.  (0) 2015.03.08
남해의 봄  (0) 2015.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