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등장인물 프리랜서 사진작가역의 숀 펜이 주인공 월터에게 사무실 밖으로 뛰쳐나오라고 손짓한다. 왼손에는 카메라 명기 라이카.

 

 

 

손끝으로 만지는 사진이 그립다. 손으로 만져봐야 현실감이 느껴진다. 인쇄된 사진에는 냄새와 촉감이 있다. 수백 번을 저장할 수 있는 메모리카드를 버리고 36번만 세상을 기록할 수 있는 필름을 카메라에 꽂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 둘씩 문을 여는 흑백 초상사진관도 마찬가지다. 찍고, 뽑고, 손에 들고 보는 사진은 온 몸으로 보는 바라보는 사진이다.

연말연시에 재개봉하는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는 온 몸으로 세상을 바라보려고 사무실 밖을 뛰쳐나가는 주인공 월터의 이야기다. 월터의 직업은 세계적인 사진 잡지 ‘라이프’지의 사진관리부서 팀장. 16년 동안 암실 같은 어두운 사무실에 갇혀서 사진만 바라보며 공상에 빠져든다. 결혼하기 위해 가입한 온라인 결혼정보업체 직원은 여자들이 홀딱 반할 만한 와일드한 프로필이 없다고 핀잔을 준다.

 

 

1936년에 창간돼 삶의 정수를 담아온 라이프지가 2007년 종간되고 온라인으로 전환된다. 2010년 처음 개봉했던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디지털 홍수에 밀려 종이 잡지를 포기할 수 밖에 없던 사진관리부서 팀장의 이야기다.

 

 “세상을 보고,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 벽을 허물고, 더 가까이 다가가 서로를 알아가고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목적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라이프지의 신념이며 정수다. 16년 동안 라이프지에서 성실히 일했지만 회사의 신념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다. 월터의 상상도 벽을 허물어내지는 못한다. 다만, 실종된 마지막 라이프지의 표지 사진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쭈뼛쭈뼛 거리며 사무실 밖을 나선다. 휴대폰도 없는, 필름만 고집하는 사진작가 ‘숀 펜’이 건네 준 마지막 필름을 찾기 위한 모험이 시작된다.

주인공이자 영화를 감독한 ‘벤 스틸러’가 만든 영상도 필름이다. 숀 펜을 찾기 위해 펼쳐지는 광활한 자연을 보며 가슴이 확 트이는 느낌을 받는 것이 필름으로 찍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장일까? 우여곡절 끝에 고산지대에서 만난 숀 펜은 망원 렌즈가 장착된 니콘 카메라를 월터에게 건넨다. 월터의 눈에는 멋진 눈표범이 2초 동안 나타났다 사라진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서. 원제는 <월터의 은밀한 삶 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

 

월터가 물어본다.

“아니, 왜 사진을 안 찍은 거예요?”

눈표범과 함께 있던 숀 폔의 영혼이 다시 몸 속으로 들어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한다.

“때로는 안찍어. 아름다운 순간이 오면 카메라로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저 그 순간 속에 머물고 싶지. 그래 바로 저기, 그리고 여기.”


아름다운 것은 관심을 바라지 않는다며 멋진 눈표범을 찾아 헤매던 사진작가는 셔터를 누르지 못했다. 아름다운 순간에 영원히 머물고 싶었을 뿐이다. 기록하는 순간, 그 순간은 과거가 된다. 숀 펜의 대사를 듣는 순간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조르바가 말했다. 

“앞날이 걱정된다고 했소? 난 어제 일은 어제로 끝내오. 내일 일을 미리 생각하지도 않소. 중요한 건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뿐이오.”

새해를 시작하며 월터의 상상에 빠져들고 <그리스인 조르바>를 떠올리며 시간에 대해 생각해본다. 새해 계획을 세우고, 뜻 깊은 시간을 기록하는 것, 그것은 아마 매우 부질없는 짓이지 않을까?  지금 이 순간을 충분히 살지 못하기 때문에 계획을 세우고 기록하는 것은 아닐까? 기록은 과거에 대한 미련, 계획은 미래에 대한 섣부른 기대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지금 이 순간을 충분하게 살아간다면 기록과 계획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아름다운 순간에 영원히 머물고 싶을 뿐일 것이다. 그리고 과거와 미래는 악마나 물어 가면 그만일 테니까.

 

 

 

2018. 1.

Posted by 김창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