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등장인물 프리랜서 사진작가역의 숀 펜이 주인공 월터에게 사무실 밖으로 뛰쳐나오라고 손짓한다. 왼손에는 카메라 명기 라이카.

 

 

 

손끝으로 만지는 사진이 그립다. 손으로 만져봐야 현실감이 느껴진다. 인쇄된 사진에는 냄새와 촉감이 있다. 수백 번을 저장할 수 있는 메모리카드를 버리고 36번만 세상을 기록할 수 있는 필름을 카메라에 꽂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 둘씩 문을 여는 흑백 초상사진관도 마찬가지다. 찍고, 뽑고, 손에 들고 보는 사진은 온 몸으로 보는 바라보는 사진이다.

연말연시에 재개봉하는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는 온 몸으로 세상을 바라보려고 사무실 밖을 뛰쳐나가는 주인공 월터의 이야기다. 월터의 직업은 세계적인 사진 잡지 ‘라이프’지의 사진관리부서 팀장. 16년 동안 암실 같은 어두운 사무실에 갇혀서 사진만 바라보며 공상에 빠져든다. 결혼하기 위해 가입한 온라인 결혼정보업체 직원은 여자들이 홀딱 반할 만한 와일드한 프로필이 없다고 핀잔을 준다.

 

 

1936년에 창간돼 삶의 정수를 담아온 라이프지가 2007년 종간되고 온라인으로 전환된다. 2010년 처음 개봉했던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디지털 홍수에 밀려 종이 잡지를 포기할 수 밖에 없던 사진관리부서 팀장의 이야기다.

 

 “세상을 보고,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 벽을 허물고, 더 가까이 다가가 서로를 알아가고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목적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라이프지의 신념이며 정수다. 16년 동안 라이프지에서 성실히 일했지만 회사의 신념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다. 월터의 상상도 벽을 허물어내지는 못한다. 다만, 실종된 마지막 라이프지의 표지 사진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쭈뼛쭈뼛 거리며 사무실 밖을 나선다. 휴대폰도 없는, 필름만 고집하는 사진작가 ‘숀 펜’이 건네 준 마지막 필름을 찾기 위한 모험이 시작된다.

주인공이자 영화를 감독한 ‘벤 스틸러’가 만든 영상도 필름이다. 숀 펜을 찾기 위해 펼쳐지는 광활한 자연을 보며 가슴이 확 트이는 느낌을 받는 것이 필름으로 찍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장일까? 우여곡절 끝에 고산지대에서 만난 숀 펜은 망원 렌즈가 장착된 니콘 카메라를 월터에게 건넨다. 월터의 눈에는 멋진 눈표범이 2초 동안 나타났다 사라진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서. 원제는 <월터의 은밀한 삶 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

 

월터가 물어본다.

“아니, 왜 사진을 안 찍은 거예요?”

눈표범과 함께 있던 숀 폔의 영혼이 다시 몸 속으로 들어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한다.

“때로는 안찍어. 아름다운 순간이 오면 카메라로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저 그 순간 속에 머물고 싶지. 그래 바로 저기, 그리고 여기.”


아름다운 것은 관심을 바라지 않는다며 멋진 눈표범을 찾아 헤매던 사진작가는 셔터를 누르지 못했다. 아름다운 순간에 영원히 머물고 싶었을 뿐이다. 기록하는 순간, 그 순간은 과거가 된다. 숀 펜의 대사를 듣는 순간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조르바가 말했다. 

“앞날이 걱정된다고 했소? 난 어제 일은 어제로 끝내오. 내일 일을 미리 생각하지도 않소. 중요한 건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뿐이오.”

새해를 시작하며 월터의 상상에 빠져들고 <그리스인 조르바>를 떠올리며 시간에 대해 생각해본다. 새해 계획을 세우고, 뜻 깊은 시간을 기록하는 것, 그것은 아마 매우 부질없는 짓이지 않을까?  지금 이 순간을 충분히 살지 못하기 때문에 계획을 세우고 기록하는 것은 아닐까? 기록은 과거에 대한 미련, 계획은 미래에 대한 섣부른 기대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지금 이 순간을 충분하게 살아간다면 기록과 계획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아름다운 순간에 영원히 머물고 싶을 뿐일 것이다. 그리고 과거와 미래는 악마나 물어 가면 그만일 테니까.

 

 

 

2018. 1.

Posted by 김창길

‘데이빗 핀처’ 감독 영화 <밀레니엄> 스틸컷. 포토그래픽 메모리 능력을 갖고 있는 살란데르. 2011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는 기록이 있다(요한복음). 기록(문자) 이전에 말이 먼저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말 이전에는 아무 것도 없었을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자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세기 1장 천지창조의 시작이다. 요한복음에는 태초에 말씀이 계셨지만,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적혀있다. 신약 요한복음 보다 앞선 구약 창세기에는 말씀인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니 빛이 ‘있었고’라고 기록됐다. 천지 창조의 시작은 ‘빛’이었다. 하나님은 이 빛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한다. 즉, 세계에 대한 인식은 빛을 ‘보는’ 것에서 시작됐다.

창조과학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문자보다는 말이, 그리고 말 보다는 ‘보는 행위’가 세상을 인식하는 첫 관문이라는 것을 성경이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주기에 인용했다. 사람들은 말을 배우기 전에 사물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 아직 ‘엄마’라고 말하지 못하는 아기들도 옹알거리며 제 부모를 알아본다. 기억은 말에 선행하며, 보는 행위와 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진 기억력’ 혹은 ‘포토그래픽 메모리’라 불리는 기억 능력이 있다. 과거의 일들을 사진 꺼내 ‘보듯이’ 구체적으로 기억해내는 능력이다. 과학적으로 증명되지는 않았다. 하긴, 과학은 ‘본다는 행위’를 증명할 수는 없다. 카메라의 원리는 과학적이지만 카메라가 찍은 사진을 의미 있게 바라본다는 것은 과학의 범주를 벗어난다. ‘본다는 것’은 언어 이전, 혹은 언어 너머의 의미 작용을 탐색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과학은 언제나 언어나 숫자, 혹은 기호를 수단으로 증명할 수밖에 없다. 과학이 사진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과학은 단지 증명된 결과에 대한 증거로 사진을 제시한다. 세계적인 과학 잡지에서는 사진을 증거로 제시하지 못할 경우 그래픽의 도움을 빌리기도 한다. 이런, 과학이 그림의 힘을 빌리다니….

증거로서의 사진, 사진의 많은 특성 중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무기다. 과학뿐만 아니라 증거 사진은 권력의 도구로 활용되기도 한다. 이명박 정부 때부터 부쩍 늘어난 경찰의 채증 요원들! 사복 차림의 요원들은 사진기자 흉내를 내며 DSLR 카메라를 들고 집회 현장에서 과격분자들의 모습을 찍어낸다. 부정할 수 없는 증거 능력 때문이다. 검찰 수사에도 도움이 된다. 다음은 ‘포토그래픽 메모리’로 검색된 최순실씨의 조카 장시호씨에 대한 중앙일보의 기사에서 발췌했다.

특검팀 관계자는 “언론의 과거 보도처럼 ‘주도면밀한 최순실의 참모’는 전혀 아니었지만 문서와 사건을 사진 찍듯 기억하는 ‘포토그래픽 메모리’가 상당히 뛰어났다”며 “장씨의 구체적인 기억 때문에 수사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장시호 “의왕대학원에서도 특검팀 생각에...” 2017. 3. 22.

 

 

 

‘데이빗 핀처’ 감독 영화 <밀레니엄> 스틸컷. 살란데르. 2011.

 

 

포토그

래픽 메모리가 사건 수사에 도움을 주는 소설이 있다. 스웨덴 기자 출신 작가 ‘스티그 라르손’의 소설 <밀레니엄>이다. 작가처럼 주인공의 직업은 ‘미카엘’이라는 이름의 심층보도 전문기자다. 미카엘은 광고주인 대기업의 비리도 여과없이 폭로하며 진실을 향한 강직한 의지를 굽히지 않는 기자다. 하지만, 강인한 기자 정신만으로는 사건을 파헤치기는 역부족이다. 미카엘에게 구원투수가 나타난다. 흘끗 흘려 봐도 사회 문제아로 보이는 ‘살란데르’라는 이름의 젊은 여성이다. 코와 눈썹에는 피어싱은 물론 몸 구석구석에 문신이 새겨져 있다. 동성애도 즐긴다. 하지만 그녀의 기억력은 특별나다. 살란데르의 두 눈은 마치 카메라의 렌즈처럼 사진을 찍으며 일반인들이 쉽게 흘려버릴 만한 장면들을 떠올린다.

반사회적이지만 천재적인 두뇌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그 천재적인 뇌는 범인들이 따라갈 수 없는 논리력과 암기력을 발휘한다. 다만 그런 뇌를 갖고 있는 것과 사회성은 별개의 문제다. ‘존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이라는 미국의 천재 수학자가 있었다. 그는 어렸을 적, ‘찰스 디킨스’의 3부작 장편소설 ‘두 도시 이야기’를 30분 동안 암송해 주위 사람들의 혀를 내두르게 했다.

그가 만든 이론은 다양하다. 프로그램 내장 방식이라는 컴퓨터 구조식은 ‘폰 노이만 구조’라 불리는데, 복잡성만 증가했지 지금 사용하는 모든 컴퓨터 구조는 바로 이 수학자가 발명한 것이라 한다. 컴퓨터를 잘 모르니 다른 예를 든다. 게임이론 중 ‘상호확증파괴(Mutual Assured Destruction)’ 전략이 있다. 핵 무장을 한 적대적인 두 나라가 핵미사일 버튼을 누를 수 없는 힘의 관계를 설명한다. 만약 한 나라가 미사일 버튼을 누르는 순간, 상대국도 핵미사일을 발사하기 때문에 서로 자멸하는 상황이 도래한다. 예측 가능한 자멸의 길을 막기 위해 핵미사일 버튼을 누를 수 없다. 즉, 핵 무장은 핵무기를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용하지 않기 위해 개발하는 것이다. 요즘 한국의 핵 무장을 요구하는 보수 야당의 주장과 맥을 같이한다.

소설 <밀레니엄>의 사회 문제아 살란데르처럼 존 폰 노이만도 두뇌만 천재였지, 사회성은 부족했다. 음담패설을 즐겼고, 비서의 치마 속을 보는 것이 취미였다. 낭비벽도 있어 고급 시계에 환장했고 자가용도 매년 갈아치웠다. 언어나 숫자, 그리고 기호의 논리를 따라가는 그의 두뇌는 다른 과학자들도 부러워할 정도로 천재적이었지만, 사회성은 젬병이었다.

 

 

 

 

존 폰 노이만. 구글 이미지.

 

 

 

사진 찍듯이 사소한 것들을 구체적으로 기억하는 포토그래픽 메모리 능력은 어떻게 가능할까? 기억은 어떤 장면을 말로 서술하거나, 글로 적거나, 다시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재현된다. 말과 글, 그림은 모두 해석의 과정이자 하나 이상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살란데르의 어깨에는 용문신이 있다’는 장면은 펑크족 스타일의 살란데르의 모습을 ‘혐오스럽다’고 해석했기 때문에 그녀의 모습을 쉽게 기억하는 것이다. 이런 해석의 과정이 없다면 기억의 힘도 떨어진다.

보통 사람들도 포토그래픽 메모리 능력이 아예 없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 사진들이 무의식의 암실에 갇혀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을 뿐이다. 범죄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최면 요법을 받아 자기가 자각하지도 못했던 장면을 기억해낸다. 굳이 최면사가 꼭 있어야 될 필요도 없다. 어떤 단초들이 암실에 갇혀있던 사진들에게 빛을 보게 한다.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는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홍차에 적신 마들렌 하나로 유년의 기억을 되찾는다.

“어머니는 사람을 시켜 생자크라는 조가비 모양의, 가느다란 홈이 팬 틀에 넣어 만든 ‘프티트 마들렌’이라는 짧고 통통한 과자를 사 오게 하셨다. 침울했던 하루와 서글픈 내일에 대한 전망으로 마음이 울적해진 나는 마들렌 조각이 녹아든 홍차 한 숟가락을 기계적으로 입술에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내 몸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감미로운 기쁨이 나를 사로잡으며 고립시켰다.”

홍차 한 숟가락의 미각과 후각이 프루스트 몸속에서 특별한 화학작용을 일으켰다. 잃어버린 시간들이 소환됐다. 포토그래픽 메모리를 갖고 있는 사람은 아마도 호주머니 속에 여러 개의 마들렌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필요할 때마다 꺼내 먹으면 무엇이든 기억해낼 수 있는 마법의 마들렌. 이러한 기억의 소환을 ‘프루스트 효과’ 혹은 ‘마들렌 효과’라고 부르기도 한다. 말이나 글은 소환된 기억을 다시 기록하는 수단일 뿐이다.

2017.9.

Posted by 김창길

신디 셔먼 인스타그램

 

 

 

 

환갑이 넘은 원조 셀피 사진작가의 인스타그램 계정이 최근 공개됐다. 1970년대에 등장해 세계 미술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셀프 포트레이트 여성 사진작가 ‘신디 셔먼(Cindy Sherman, 1954-)’의 인스타그램이다. 자화상 사진을 그녀가 처음 찍었던 것은 아니다. 공식적으로 카메라의 발명이 선언됐던 1839년에 ‘로버트 코닐리어스(Robert Cornelius)’라는 사진가가 이미 자신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하지만 사진 자화상이라는 표현 형식에 대한 가능성을 의미 있게 각인시킨 사람은 미국 여성 아티스트 신디 셔먼이었다. 그녀의 자화상 2컷은 1981년에 390만 달러에, 1985년에는 270만 달러에 팔리기도 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사진 10위 안에 2장을 밀어 넣은 비싼 사진작가가 노년에 접어들며 인스타그램에 손을 뻗친 것이다.

신디 셔먼의 인스타그램 자화상은 다른 셀피 사진들처럼 예쁘고 귀엽고 깜찍하지 않다. 그녀의 많은 나이 때문이 아니다. 그녀는 변장술의 대가다. 신디 셔먼의 탁월한 메이크업 솜씨와 패션 감각은 60이 넘는 나이를 쉽게 속일만큼 기똥차다. 하지만 신디 셔먼은 비슷한 나이의 한국 여성 대통령처럼 팽팽한 피부를 위해 보톡스나 필러에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녀의 선택은 반대였다. 변신술은 자기 모습을 망가뜨리기 위해 사용됐다. 하지만 그런 흉측하면서도 기괴한 그녀의 얼굴 사진에 13만이 넘는 인스타그래머들은 환호했다.

젊었을 적 신디 셔먼의 모습은 어땠을까?

 

 

신디 셔먼, 무제 #153, 1985
https://www.artsy.net/artwork/cindy-sherman-untitled-number-153

 

 

 

강가에 한 젊은 여성의 사체가 누워 있다. 1985년에 발표된 셀프 포트레이트 무제(#153) 사진이다. 제목이 없기에 이끼 가득한 검은 흙밭에 누워있는 이 여성을 사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핏기 없는 얼굴, 초점 잃은 눈빛, 입가와 이마, 볼에 뭍은 흙과 더럽혀진 옷들을 관찰하는 눈은 신디 셔먼을 사체로 판단하게 만든다. 오른 쪽 뺨에 보이는, 시간이 좀 지난 듯한 피멍 자국은 죽음의 원인을 타살로 몰아간다. 당시 방영된 미국 드라마 ‘트윈 픽스(Twin Peaks, David Lynch 감독)’를 본 사람이라면 신디 셔먼의 얼굴을 보며 살해당한 주인공 ‘로라’의 모습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무제#153 사진뿐만 아니라 신디 셔먼의 다른 사진들 대부분은 대중 매체가 쏟아내는 여성 이미지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신디 셔먼은 자기가 대중 매체들의 이미지를 미리 염두에 두지 않고 사진을 만들었다고 말했지만, 사람들은 대중 매체의 상투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본다. 대중 매체로(TV, 영화, 광고, 인터넷 등) 둘러싸인 일상을 사는 현대인들이 이미지를 떠올리는 방식은 이런 상투적인 이미지에 기댈 수밖에 없다. 마땅히 견줄만한 실재도 없다. 생생한 체험을 표현할 때 ‘마치 한 편의 영화 같았어’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적당해 보이는 것처럼. 이런 의미에서 프랑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현대인은 원본 없는 파생실재의(시뮬라크르simulacre) 세계 속에 갇혀 있다고 말한다. 스튜디오라는 가상 공간에서 촬영된 신디 셔먼의 시체놀이 사진은 15년 후 270만 달러에(약 30억) 팔렸다.

시체놀이 사진이 이토록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다시 물어본다면,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젊은 여성의 사체 사진을 그토록 비싼 돈을 주고 구입했을까? 질문에 답이 있다. 제 정신이 아니기 때문에 이 사진을 살 수 있었다. 사체에서 풍기는 마력은 제 정신으로는, 이성의 영역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이미지이다. 사체 앞에서 혼란스러운 살아있는 자들은 죽은 자의 얼굴을 가리기위해 안간힘을 쏟는다. 눈 뜨고 죽은 사체는 눈꺼풀을 닫아 주고, 흰 천이나 거적으로 사체의 얼굴을 덮는다. 사체의 얼굴은 두렵다. 공포감을 발산하는 사체의 얼굴은 장의사에 의해 화장되거나 살아있을 적의 얼굴 사진이 대신해 조문객들을 맞는다.


죽은 사람의 얼굴은, 프랑스 비평가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의 표현에 따르면(‘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에서), 산 자들을 ‘홀리는 힘’을 갖고 있다. 장례 의식은 죽은 사체의 접근을 제한하는 ‘금기’를 설정하고, 산 자들을 다시 일상의 세계로 복귀시키는 의례 장치다. 어느 누가 제 정신이 아니고서는 장례식장을 찾아 고인의 진짜 얼굴을 보려 한단 말인가? 신디 셔먼은 이런 홀리는 힘을 갖고 있는 사체의 얼굴에 대한 금기를 건드렸다. 눈 뜨고 죽은 한 젊은 여성이 강가에 누워 당신을 홀리고 있다. 조명에 반사된 신디 셔먼의 눈동자는 이 홀림의 힘을 증폭시켜준다. 아직 그녀의 몸에는 빠져나가지 못한 혼이 남아 있는 듯한, 식어가는 생명의 느낌도 묻어있다. 조르주 바타유는 금기에 대한 위반에서 예술이 탄생했고, 바로 이 넘어섬에 대한 욕망이 최초의 인간과 동물을 구별 짓는 인간 조건이라고 말한다.

 

 

 

신디 셔먼, 무제 #96, 1981 https://www.artsy.net/artwork/cindy-sherman-untitled-number-96
지난 2012년에 370만 달러에 거래됐던 신디 셔먼의 사진. 창백한 사체를 표현한 차가운 느낌의 무제#153과는 여러 모로 대조적이다. 빨간 매니큐어를 칠하고 붉게 달아오르는 소녀의 얼굴과 시선은 미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금기를 위반하려는 신디 셔먼의 욕망은 그녀가 작품 활동을 시작한 1970년대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진다. 초기 흑백사진 무제필름스틸(Untitiled Film Still) 시리즈도 일종의 위반에서 출발한다. 카메라가 포착해야할 진실은 뒷전으로 미루고 연출 사진을 만들었다. 대중 매체가 쏟아내는 가상의, 상투적인 이미지를 재사용한다. 마치 할리우드 영화의 스틸컷처럼. 실재가 아닌 허구의 이미지에 탐닉하는 그녀의 시선은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회적 금기를 넘어선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도색잡지 모델, 걸인, 마약 중독자, 시체 등 광인의 범주에(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인물군) 속하는 사람들을 신디 셔먼은 연기한다.

신디 셔먼은 사진 내용뿐만 아니라 사진을 찍는 형식도 전복시켰다. 그녀는 자기 고백적인 셀프 포트레이트라는 형식을 취하면서 고해성사는커녕 역할 놀이를 펼쳤다. 그리고 카메라 뒤에 숨은 다른 사진작가들과 다르게, 렌즈 앞에 도발적인 작가의 모습을 드러냈다. 카메라 뒤에 숨은 작가는 하늘 위에 숨어 목격되지 않는 신과 같은 존재다. 작품은, 피사체는, 피조물은 이런 일방적인, 그리고 관음증을 유발시키는 시선의 세계에서 갇혀 있다. 피조물은 신의 뜻에 따라 탄생했고, 작품은 작가의 의도에 따라 해석돼야 했다. 신디 셔먼은 이런 시선의 위계구도를 전복했다. 해석의 다양성을 열었다. 그녀에게 카메라는 다른 사진작가들이 믿고 있듯이 진실을 포착하는 기계장치가 아니다. 다양한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수단일 뿐이다. 때문에 그녀는 사진작가라는 타이틀보다는 아티스트라고 불리기를 원한다.

사진을 하나의 표현 수단으로 생각하기에 신디 셔먼의 인스타그램 사진은 조작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인다. 아이들이 색칠공부 놀이를 하듯이 그녀의 얼굴에 낙서를 한다. 망측하지만, 거부감 없이 바라볼 정도의 기괴한 얼굴들이다. 다른 셀피들과 다른 이유는 여기에 있다. 신디 셔먼은 카메라 뒤에 숨은 시선, 그리고 자기 사진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문제 삼고 있다. 누구를 위해서 예쁘고 깜찍해 보이려는가? 인스타그램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팔로워라 불리는 익명의 사용자들이다. 하지만 사고의 기능은 스마트폰 카메라 앞에서 멈춘다. 스마트폰 카메라에 연결된 가상공간을 떠도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관음의 대상이 되길 원한다. ‘좋아요’, ‘공감’ 횟수가 늘어날수록 만족감은 커져 간다. 나를 봐주세요! 나를 눌러주세요! 나를 공유해주세요!

 

 

 

신디 셔먼 인스타그램

 

 

“나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도록, 내 이미지의 모든 부분에서 힌트를 얻기를 바랍니다.” - The Guardian 2016. 7. 3.

신디 셔먼이 인스타그램에 자화상을 올린 이유나 의도는 알 수 없다. 그녀 자신이 인스타그램에 대해 아직 이렇다 할 이야기를 내놓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자기 사진을 보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자기 자신을 돌아볼 것을 주문한다. 그녀는 다만, 자신의 그로테스크한 얼굴들을 셀피 중독자들에게 투척할 뿐이다.

 

2017.9.

Posted by 김창길

 

 

 

 

 

 

지난 2014년 12월 세계 미술시장을 들썩이게 만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진 한 장이 70억이 넘는 가격에(650만 달러) 팔렸던 것. 지난 2011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430만 달러에 낙찰된 독일 사진작가 안드레아스 구르스키(Andrea Gursky)의 작품 ‘라인(Rhein)Ⅱ’을 3년 만에 갈아치웠다. 사진이 예술인가 아닌가라는 해묵은 논쟁은 끝났지만(사진도 예술로 인정) 예술 관계자들은 70억이 넘는 사진 가격에 대해서는 쉽게 고개를 끄떡일 수 없었다. 특히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이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이라 더 그러했다.

문제의 사진을 찍은 사람은 호주 출신 사진작가 피터 릭(Peter Lik)이다. 언뜻 근육질 카우보이를 연상케 하는 상남 스타일의 피터 릭은 광활한 대자연을 누비며 거대한 스케일의 사진을 찍고 있다. 그의 사진 이력은 자영업으로 일궈냈다. 사진이나 예술에 대해 공부한 이력도 없다. 물론, 그가 사진공부를 하지 않았다고 그의 사진 값을 헐값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다만, 그가 찍어내는 사진들이 예술평론가들에게 읽을거리가 없다는 점이 문제다. 이를테면 ‘피터 릭의 사진은 이런 혹은 저런 면에서 이전 사진과는 다른 시각적 즐거움을 줍니다’라고 평가할 요소를 찾아보기 어렵다.

 

 

Peter Lik
http://www.lik.com/theartist/photos/hero-shots/bioimage1.html

 

 

피터 릭의 사진이 거래되는 방식도 기존 미술시장에서 벗어나 있다. 크리스티 경매시장처럼 기존의 미술거래시장에서 벗어나 있다. 피터 릭의 사진은 그가 소유한 15개의 갤러리에서 판매된다. 그래서 혹자는 650만 달러에 판매되었다는 사실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경매시장에서의 거래는 공개 입찰과정을 거치지만, 그가 650만 달러에 판매했다는 팬텀 사진은 그가 고용한 한 홍보회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의 사진을 좋아하는, 밝힐 수 없는 익명의 수집가가 팬텀 사진을 구매했다는 것이다.

피터 릭은 자기 사진의 값을 자기 자신이 정한다. 그가 갤러리에 내놓은 풍경사진은 950장의 한정판으로 출시된다. 처음에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내놓는다. 하지만 950장의 잔고가 줄어들면 줄어든 만큼 거꾸로 사진 값은 올라가도록 설정해 놓는다. 950장의 사진이 95%가 팔리면 나머지 5%의 사진은 “Premium Peter Lik‘ 한정판 라벨이 붙으며 높은 가격으로 수정된다. 그리고 98%가 팔리면 ”Second Level Premium Peter Lik“ 한정판으로 더 높은 가격이 설정된다. 마지막 한 장은 부르는게 값이다.

사진이 팔리는 한, 자기 사진의 가격을 자기가 매긴다고 나무랄 수는 없다. 거래됐다는 것은 구매자들이 그 사진 가격에 동의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 피터 릭에게 기존 미술시장에서 그의 사진을 팔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피터 릭의 회사가(Peter Lik USA) 밝힌 것처럼 팬텀이 그 회사 판매시스템을 통해서 세계 최고가를 경신했다면, 거꾸로 기존 미술거래시장의 시스템에 대한 효율성도 도마에 오를 수 있다. 예술가 입장에서는 어쨌든 자기 작품이 비싼 가격에 팔려야 운신의 폭이 넓어질테고, 자기 작품의 가격을 자기 자신에 정한다는 점에서 성공과 실패도 온전히 자기 몫으로 남기 때문이다. 피터릭USA 사진판매시스템은 훌륭한 예술평론가나 세계 유명 갤러리가 필요 없다.

 

 

 

 

미술 거래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는 이정도로 마무리하고 팬텀 사진 자체를 들여다본다. 첫 번째로 눈에 거슬리는 점이 사진 밑에 달린 사진 제목이다. 너무 쉬운 제목 아닌가? 피터 릭은 흑백톤의 앤털로프 협곡 사진에 ‘유령’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협곡 상공에서 쏟아지는 햇살 속에 무정형으로 날리고 있는 먼지가 만들어내는 묘한 분위기는 그가 굳이 ‘팬텀’이라는 제목을 붙이지 않았더라도 유령이나 천사 혹은 악마가 출현할 듯한 착각이 든다. 사진을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여지를 자기 자신이 막아놓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그의 사진에는 그런 분위기 외에는 다른 읽을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제목만큼이나 사진 내용도 쉽다.

물론 팬텀 사진이 쉽다고 나무랄 일은 아니다. 하지만 사진 미학의 흐름에서 보자면 그의 사진은 사진 초창기 시절 유행했던 한 장의 픽토리얼 사진일(당시 유행하던 스타일의 그림을 흉내 내는 사진들) 뿐이다. 미술평론가 조나단 존스(Jonathan Jones)는 다음과 같이 그의 사진을 혹평한다.

‘진부하고 천박한 흑백사진이다. 예술이 아니다. 그리고 사진이 절대 예술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말해주는 사진이다.’

팬텀 사진이 진부하고 천박한 이유는 무었을까?

앞서 말했듯이 사진이 예술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란은 과거에 진행됐다. 초창기 픽토리얼 사진은 그림을 흉내 냈기 때문에 사진 자체의 미학이 없었다. 이에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에 의한 ‘사진분리파’를 시작으로 사진은 그림을 벗어난 사잔 자체의 미학을 발전시켰다. 사진 미학의 흐름을 다 기술하며 피터 릭의 팬텀을 평가하자면 이야기가 너무 방대해질 것이다. 다만 지난 2011년에 세계 최고가를 기록했던 안드레아스 구르스키의 라인Ⅱ를 살펴보면 왜 피터 릭의 사진이 사진 가격만 최고치를 경신했을뿐 예술적인 측면에서 새로움을 보여주는데 실패했는지 엿볼 수는 있을 것이다.

 

 

구르스키의 사진은 과거의 사진들을 뛰어 넘는 미학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다. 당시의 사진 미학은 ‘유형학’이라는 시각적 틀을 이용해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안드레아스 구르스키도 우리가 매일 생활하는 공간인 아파트, 마트, 사무공간 등에서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색과 선의 유형(type)을 발견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사진들을 보면, 우리가 생활하던 공간이 낯설어진다. 다소 높은 위치에서, 꽤 떨어진 거리에서 바라본 현대인의 생활공간은 수평과 수직, 그리고 반복되는 색깔에 둘러싸인 추상적인 공간처럼 다가온다.

반복되는 일상은 세상을 습관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매주 방문하는 마트이지만, 우리는 상품의 브랜드와 세일 가격만 탐색한다. 좀 물러나서, 조금은 다른 위치에서 마트의 전체적인 모습을 바라본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수직과 수평으로 첩첩산중 둘러싸인 상품의 세계에서 골몰하는 현대인의 모습이 보인다.

 

 

 

 

 

인간이 만들어낸 현대적인 공간을 새롭게 조망하는 안드레아스 구르스키의 시선은 자연을 만났을 때 극도의 단순화를 향해 나아간다. 그가 바라본 라인강에는 수평선이라는 선적인 요소와 두 가지 색만 남아 있다. 안드레아스 구르스키가 보고 싶은 라인강의 모습이다. 보고 싶은 모습이라고? 실재의 모습은 아니다. 그는 개를 끌고 잔디 위를 산책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디지털로 제거했다. 강둑 위의 건물들도 지워버렸다. 하지만, 예술평론가들은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순수예술은 디지털 처리과정을 디지털 조작이라 폄훼하지 않고 다만 안드레아스 구르스키가 바라보고 있는 시선의 참신함에 집중할 뿐이다.

다시 피터 릭의 사진으로 돌아간다. 피터 릭은 그가 탐험하는 광활한 자연을 어떻게 해석했을까? 작가 특유의 시선을 찾아보기 힘들다. 인터넷 구글 이미지에는 비록 컬러이지만, 팬텀과 비슷한 앤털로프 협곡의 사진으로 가득 찼다. 미술평론가 조나단 존스가 ‘천박하다’고 혹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제국주의 시절의 인디아나 존스처럼 오지를 탐험하며 자연의 신비로운 광경을 복사할 뿐이다. 그 광경을 복사하는 것은 그의 카메라이지 그의 색다른 시선이 아니다.

 

 

 

 

 

구글로 검색된 앤털로프 협곡 사진

 

 

너무 혹평만 늘어놓았을까? 그의 사진이 그리 형편없는 사진은 아니다. 피터 릭이 담아낸 앤털로프 계곡의 모습은 누가 뭐라해도 몽환적이다. 탄탄하게 잘 짜여진 화면 구성도 밀도감이 높다. 다만 70억이 넘는 돈을 지불할 값어치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다만 이케아에서 인테리어 용품을 구경하다가 10만원이라는 가격표를 달고 있는 팬텀 사진을 발견했다면 그 사진을 구입할 유혹에 넘어갈 것 같다. 어쨌든 협곡이 만들어내는 곡선과 명암은 아름답지 않은가? 아마 피터 릭은 이런 시각적인 유혹을 잘 알고 있는 사업가일수도 있겠다.

피터 릭은 당신을 유혹한다.
당신이 재력가가 아니더라도, 예술사조의 흐름을 모르더라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터 릭의 사진을 살 수 있습니다. 995장 찍어냈으니까요. 다만, 서두르세요. 재고량에 따라 사진 값이 갑자기 올라가니까요.

Posted by 김창길

덩케르크. 잔교 위에서 배를 기다리던 군인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가고(F. 스콧 피츠제럴드 소설. 주인공 벤자민 버튼이 거꾸로 나이를 먹으며 결국에 갓난아기로 돌아가 죽는 이야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시간은 복잡하게 흐른다. 시간의 속도도 다르다. 처음 주목받은 영화 <메멘토>(2000)에서부터 <인셉션>(2010), <인터스텔라>(2014)를 거쳐 최근 개봉작 <덩케르크>까지 줄곧 시간과 기억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기억은 불확실해. 기억은 기록이 아니고 해석이거든.’

 

 

<메멘토>는 아내의 죽음에 대한 충격으로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이 범인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다. 주인공이 기억할 수 있는 시간은 단 10분. 아내가 살해당했다는 것과 자기 이름만 기억하는 주인공 ‘레너드’는 외장하드의 도움을 받아 사건을 해결하려 안간힘을 쓴다. 레너드의 외장하드는 문신과 폴라로이드 카메라다. 주요 단서를 몸에 새긴 문신은 누군가 쉽게 지울 수 없는 기록이고, 한번 찍힌 사진은 다시 만들 수 없는 지나간 과거다. 문신과 사진에 의존해 기억을 되살리려는 주인공은 절규한다.

‘집중해. 집중. 잊지마. 절대 잊지마. 기억해…’


 

 

메멘토. 2014년 재개봉.

 

 

사진 한 장은 어떤 시간을 담고 있을까? 영화 속에 등장하는 폴라로이드 카메라는 셔터를 누르면 자동으로 프로그램된 짧은 순간을 기록한다. 만약, 주인공의 손에 수동 카메라가 있었다면? 수동 카메라는 어떤 한 장면에 대한 시간을 설정할 수 있다. 셔터 속도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레너드가 기억하는 시간 단위인 10분을 카메라에 적용한다면 어떤 사진이 나타날까?

 

250분의 1초. 야외 사진 촬영 시 적당하다고 여겨지는 셔터 속도다. 격렬하지 않은 피사체의 움직임을 적당히 고정시킬 수 있는 시간이다. 셔터 막이 열려 있는 250분의 1초 동안 카메라에 장착된 필름이나 CCD는 250분의 1초 동안 벌어진 사건을 기록한다. 셔터 속도를 많이 늦춘다면 사진의 시간성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셔터 막을 오래 개방한 야경 사진을 생각해본다. 카메라는 긴 시간의 장면을 고정시키기 위해 자신의 몸을 삼각대에 고정시킨다. 10분 이상 셔터를 열어 놓으면 어두운 도심에 도로 위를 질주하는 자동차의 모습은 단지 흐르는 빛의 궤적으로만 기록된다. <메멘토>의 주인공 레너드는 10분을 기억할 수 있지만, 카메라가 기억할 수 있는 10분은 건물과 땅 등 움직이지 않는 피사체만 기록한다. 사람, 구름, 자동차 등 움직이는 모든 피사체는 그저 흐르는 궤적이 될 뿐이다.

 

 

‘사진은 시각적 무의식의 세계를 보여준다’


독일 문예평론가이자 사상가인 ‘발터 벤야민’은 80여년 전 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통해 복제 장치인 카메라에 대해 생각한다. 사진이 발명된 이후, 우리는 카메라 발명 이전과는 다르게 세상을 바라보고 기억한다. 지금이야 당연한 것처럼 기억하는 장면들은 사실 두 눈으로 직접 본 장면이 아니라 카메라가 본 이미지들이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보았다고 착각할 뿐이다.

 

가령 한 마리 말이 달리는 장면을 떠올려본다. 걷는 것이 아니라 달리기 때문에 어느 순간 말은 네 발이 땅에 닿지 않고 공중에 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두 눈을 통해 기억된 장면이 아니다. 인간의 눈은 500분의 1초라는 빠른 순간을 포착할 수 없다. 스포츠 사진은 대게 셔터속도 500분의 1초 이하로 한 장면을 포착한다. 말이 공중에 떠 있는 장면은 두 눈이 지각한 것이 아니라 이미 두뇌 속에 저장된 공중에 떠 있는 말 달리는 사진을 다시 꺼내어 눈의 시지각과 기억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서울우유의 우유 왕관 사진도 마찬가지. 물방울이 떨어질 때 한 순간 나타나는 왕관 모양은 카메라가 포착한 장면이지 인간의 두 눈으로 지각할 수 있는 장면은 아니다. 우리는 서울우유 왕관을 보았기 때문에 아스팔트에 떨어지는 빗방울에도 그런 모습을 대입시켜 그 장면을 해석한다. 이런 이유로 발터 벤야민은 카메라가 시각적 무의식의 세계를 드러내주는 장치라고 말한다. 도저히 지각할 수 없는 시간 단위의 장면을 카메라의 도움으로 볼 수 있게 된다는 것. 정신분석학이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무의식의 정신세계를 드러내듯이 카메라는 지각할 수 없었던 시각의 세계를 재현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은 영화 <인셉션>에서 무의식의 세계인 꿈을 탐험한다. 기억을 훔치는, 또는 없었던 기억을 삽입하는 꿈 도둑들의 이야기다. 줄거리는 다소 복잡하다. 꿈속의 꿈으로, 또 그 꿈속의 꿈으로, 마침내 꿈의 밑바닥인 림보의(limbo. 천국과 지옥 중간의 세계. 영화에서는 다시 깨어나지 못하는 밑바닥의 세계) 세계로 들어가는 양파 껍질 같은 공간에서 사건을 풀어간다. 영화가 더 복잡한 건 이 꿈의 단계에서 시간성도 다르게 설정된다는 점이다. 현실에서의 5분은 꿈속에서 1시간, 꿈속의 꿈에서는 12시간으로 설정된다. 2014년 작품 <인터스텔라>에서는 우주와 블랙홀의 세계에서 엿가락처럼 휘어지는 시공간이 펼쳐진다.

 

 

 

인셉션 2010

 

 

 

스릴러와 SF영화를 줄곧 만들었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이번 최신작 <덩케르크>에서 집단의 기억을 건드렸다. 영국인들이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들어왔던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펼쳐졌던 덩케르크 철수 작전이다. 시공간을 재설정하는 그의 전매특허는 덩케르크 철수작전에서도 작동한다. 땅에서의 일주일, 배에서의 하루, 공중에서의 1시간이 1시간 46분의 영화적 시간으로 재구성된다. 서로 다른 공간에서 체감하는 기억은 절대적 시간으로 환산되지 않았다. 비록, 공중에서의 1시간이었지만, 그 긴박했던 상황은 육지에서의 일주일과 비슷한 강도의 경험으로 각자의 뇌리 속에 박힌다. 그리고 각자 처한 시공간이 다르기 때문에 오해도 생겨난다.

 

 

 

“너네 공군은 뭐 했어?”

 

 

 

살아 돌아온 한 육군이 스핏파이어 조종사에게 나무란다. 고립된 육군을 위해 끝까지 공중전을 펼쳤던 비행기 조종사는 할 말이 많았다. 그도 육군과 마찬가지로 구사일생 목숨을 건졌을 뿐인데, 아군이 같은 아군을 욕하는 것이다. 난처해하는 표정을 본 나이 지긋한 한 영국 시민이 공군 조종사에게 말을 건넨다.

 

 

 

“신경쓰지 말게, 우린 아니까.”

공중에서의 한 시간, 배에서의 하루, 육지에서의 일주일도 아닌 영국 본토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바라보았던 영국 국민의 시각이다. <덩케르크>를 보는 관람객은 영화 속 영국 국민들과 비슷한 시선으로 비행기 조종사를 바라본다. 그들은 공군이건 해군이건 모두가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자국의 병사들이다. 병사들이 살아 있어야 적을 막아낼 수 있다. 그래서 민간인들은 병사들을 구하기 위해 작은 배를 몰고 프랑스 덩케르크 해변으로 향했다.

 

 

덩케르크 2017

 

 

본토로 돌아온 병사들에게 따뜻한 차를 대접하던 눈 먼 노인이 병사의 얼굴을 만지며 말을 건넨다.

“수고했어.”

변변한 전투 한번 못하고 돌아온 병사가 솔직하게 대답한다.

“우린 살아 돌아왔을 뿐인 걸요.”

노인이 다시 말한다.

“그거면 충분해!”

 

Posted by 김창길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와 함께 초등학교 4학년 소녀는 극장에 갔다. 인천에서 제일 오래된 극장, 애관극장을 찾았다. 대기업 체인점 극장들이 봉준호 감독 신작 '옥자' 상영을 거부했기 때문에 다른 중소 극장들이 스크린에 옥자를 걸었다. 한산했던 동인천 애관극장은 모처럼 활기가 넘쳤다. 인기 블록버스터 영화를 내걸어도 썰렁했건만, 극장 안은 가족 단위 관람객들로 만석이었다. 슈퍼돼지 옥자의 얼굴이 클로즈업 됐다.

 

"근데, 옥자 눈이 사람 같."

 

소녀의 눈은 정확했다. 사진기자인 아빠의 눈은 옥자의 눈이 돼지의 눈인지, 개의 눈인지 구분할 줄 몰랐다. 그제야 아빠의 동공은 열렸다. 옥자의 눈은 물론, 생김새, 행동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넷블릭스

 

 

옥자의 눈은 왜 사람의 눈일까? 옥자는 주인공 소녀 미자(안서현)가 바라본 옥자인데, 미자에게 옥자는 가축이 아니다. 할아버지(변희봉) 눈에는 가축이겠지만. 옥자는 미자와 함께 유아기를 보낸 친구이자 가족이다. 단순히 유아기를 보냈기 때문만은 아니다. 옥자와 미자가 사는 공간은 첩첩산골이다. 먹거리는 닭 몇 마리를 기르며 수렵 및 채집을 통해 조달한다(옥자는 사냥개처럼 수렵 활동을 돕는다.). 옥자와 미자는 자본주의 쳇바퀴에서 벗어난 시간과 공간에서 살고 있다. 미자의 옥자를 생각하기 전에, 할아버지가 바라본 옥자를 바라본다.

"어떤 농부는 자신의 돼지를 아주 좋아하게 되고, 그리고 그는 그것의 고기를 기꺼이 소금에 절여 버린다. 이 문장 속에 들어 있는 두 개의 진술이 '그러나'가 아니라 '그리고'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

 

평론가 존 버거(John Peter Berger 영국 1926-2017)지식인답지 않게 ", 우리는 동물을 구경하는가?"라는 좀 엉뚱한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그 대답은 복잡하고 다차원적이다. 먼저, 그는 소농계급이 바라보는 가축에 대한 시선을 짚어본다. 위에서 기술한 것처럼 농부인 할아버지는 옥자를 좋아하지만, 옥자는 결국 삼겹살, 목살, 등심, 앞다리살 등으로 해체될 존재라고 미자에게 말한다. 옥자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닌 것이다. 나의 할머니도 그랬다. 마당에 기르던 강아지들은 성인이 되면 없어졌다. 할머니도 강아지를 미워하지는 않았다. 존 버거는 가축은 지배의 대상이면서 숭배의 대상이고, 길러지는 것이면서 동시에 희생의 제물로 바쳐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미자에게 옥자는 좀 더 의미 있는 존재다. 미자와 옥자는 잠도 같이 자지만,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옥자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미자가 돼지의 말을 하는 것도 아니다. 영화에는 옥자와 미자의 대화 장면만 있을 뿐, 소리는 없다. 관객은 미자의 반응을 통해 옥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옥자 자신이 사람의 눈빛으로 말을 할 때도 있지만.

 

 

넷플릭스

 

 

미자가 옥자와 대화를 할 수 있었던 힌트는 영화에 나오는 한 장의 기념사진에 있다. 직립보행의 재미를 느낄만한 나이의 미자와 아직 슈퍼돼지로 변신하지 않은 옥자가 서로 뒤엉켜 바닥에 뒹구는 모습. 미자는(옥자도 마찬가지겠지만) 정상적인 가족의 테두리 안에서 성장하지 않았다. 할아버지 한 명, 그리고 옥자와 함께 성장했다. 언어는 구별 짓기에서 시작하는데, 미자와 옥자는 서로 뒤엉켜있다. 이름도 비슷하다. 가축이 가족 이름의 돌림자로 호명된다.

옛 기록물들에는 동물과 사람이 서로 뒤엉켜 있다. 마치 동화처럼. 인류 최초의 그림인 동굴벽화의 피사체는 소, 사슴 등 동물이다. 고대 문헌 중의 하나인 일리아스(Illias)에서는 전쟁에서 죽은 인간과 말에 대한 묘사의 방법이 동일하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날개를 달거나 하체가 짐승인 종족도 자주 등장한다. 수단 남부의 누에르족의 세계관도 동물과 사람이 뒤죽박죽이다.

 

"인간을 포함, 모든 생물은 원래 친구처럼 한 곳에서 살았다. 여우가 몽구스에게 사주하여 코끼리 얼굴에 몽둥이를 집어던지도록 한 이후에 불화가 시작됐다. 반목은 계속 됐고, 동물들은 서로 헤어지게 됐으며, 각각의 동물이 제 갈 길로 가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살게 되고 서로 죽이기 시작했다. 맨 처음에는 스스로 숲속에서 살고 있던 위장(stomach)이 인간의 몸속으로 들어왔고, 현재처럼 언제나 굶주리게 됐다. 인간의 몸과는 별개의 것으로 존재하던 성기들도 각기 남자와 여자의 몸에 붙게 되어 그것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서로를 원하게 만드는 원인이 됐다. 코끼리는 인간에게 수수를 빻는 방법을 가르쳤고, 그렇게 해서 인간은 오로지 쉬지 않고 노동을 해야만 굶주림을 면할 수 있게 됐다."(로이 윌리스 <인간과 야수>)

 

누에르족들에게 노동을 가르친 것은 족장도, 아버지도 아니었다. 코끼리였다. 그렇게 동물은 인간과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동물이 사람 주변으로 밀려나기 전까지는.

사람에게 노동을 가르쳤던 코끼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구경꺼리로 전락했다. 산업혁명을 통해 경제 강국이 된 유럽 열강들은 이국땅을 넘보며 식민지를 개척한다. 전쟁의 승리에는 전리품이 따르는 법, 식민지 전쟁의 승자들은 이국의 희귀한 야생동물들을 승리의 기념물로 본국에 데려온다. 동물원이 탄생한 건 바로 이 즈음이다.

 

 

 

바넘 앤드 베일리 서커스단이 제작한 점보 홍보 포스터. 점보의 크기를 과장해 한 학급 분량의 아이들이 등에 앉고도 남는 ‘괴수’로 묘사했다./ 최명애씨 제공

 

 

세계 최초의 동물원인 런던 동물원의 인기 스타는 아프리카 코끼리였다. 점보(Jumbo)! 아시아 코끼리보다 몸집이 컸던 점보는 아이들을 등에 태우고 코끼리 손으로 빵을 받아먹었다. 괴수같이 거대한 동물이 한갓 어린이들의 노리갯감이 된 것. 타민족을 식민화 시키듯, 야생 동물들에 대한 인간의 승리는 동물원에서 목격됐다.

다시 옥자로 돌아간다. 소녀가 말했듯, 옥자의 눈은 사람의 눈이다. 옥자의 전체적인 모습은 하마다. 야생의 하마는 천하무적의 무시무시한 천적인데, 언제부턴가 우리에게 하마의 이미지는 귀여운 존재다. 마치 아기코끼리 점보처럼. 옥자의 얼굴은 애완동물 그 자체다. 강아지 얼굴이다. 덩치가 커서 그렇지 작다고 상상해보면 바둑이 얼굴이다. 더 자세히 옥자의 얼굴을 들여다보니 옥자의 귀가 아기 코끼리 덤보를 닮았다.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덤보'의 원래 이름은 '점보 주니어'. 엄마가 점보인데, 그 모티브가 바로 런던 동물원의 인기스타 점보였다.

다시 점보 이야기다. 문화생태학자 최명애씨의 <반려종 이야기-큰 것의 대명사 코끼리 점보>에서 동물과 사람에 대한 시선에 대한 힌트를 읽어낼 수 있다. 런던동물원에서 이상 증세를 보였던 코끼리 점보의 유일한 친구는 조련사 '스콧'이다. 하인 부부의 아들로 태어난 쑥기 없는 스콧에게도 유일한 친구는 점보였다. 스콧은 밤이 되면 야수로 변하는 점보와 함께 맥주와 위스키를 나눠 마셨다. 취한 스콧이 노래를 부르면 점보는 코끼리 손으로 트럼펫 연주를 했다니 그리스 신화의 오르페우스(Orpheus)를 닮았다. 오르페우스가 리라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면 초목과 짐승들이 감동을 받았다니.

 

 

 

넷플릭스

 

 

 

인도에서는 코끼리 조련사를 마훗(mahout)이라 부른다. 마훗은 소년 시절에 코끼리 한 마리를 만나 평생 그 코끼리를 돌본다. 마훗과 코끼리의 관계는 단순한 조련사나 사육사가 아니라, 사랑과 착취가 뒤섞인 기묘한 우정을 나누는 이종 간 동반자 관계라고 최명애씨는 말한다. 점보의 마훗이었던 스콧은 점보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죽기 며칠 전에는 마치 점보가 살아있는 듯 상상 속에서 점보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도 목격됐다고 한다.

 

영화 옥자의 미자는 슈퍼돼지의 마훗이다. 거대 자본이 데려간 옥자를 미자는 구출 할 수 있을까? 옥자 등에 탄 미자는 코끼리 덤보처럼 하늘을 훨훨 날아 자본주의라는 울타리를 벗어날 수 있을까?

 

2017. 6.

 

Posted by 김창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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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오늘(2007629) 인류는 새로운 미디어를 손에 거머쥐었다. 손바닥만한 스크린을 손끝으로 만지면 앨리스처럼 토끼굴 속 이상한 나라에 빠져든다. 앨리스는 '나를 마셔요'라고 쓰인 물약을 먹고 자기 몸의 크기를 바꾸며 이상한 나라를 모험한다. 우리는 물약 대신 손톱만한 앱을 터치한다. 토끼굴 속 이상한 나라보다 다양한 세상이 펼쳐진다. 토끼굴을 안내한 건 '토끼씨', 우리를 안내한 사람은 '스티브 잡스(Steve Jobs, 1955-2011)'. 아이폰 손끝 맛에 중독된 유저(user : '사용자'라는 뜻 이외에 '마약중독자'란 뜻을 내포한 '유저'라는 단어를 생각해본다. 매스 미디어(대중매체 mass media)와 사람들의 관계를 지시하는 대중(mass : 제멋대로 모여 있는 사람들의 무리)은 개인 미디어의 유저가 된다.)들은 10주년 기념판 아이폰8을 고대하고 있다.

 

 

google image

 

 

아이폰은 기존 카테고리를 붕괴시켰다. PC, 영화, 게임 등 그 범주는 다양하다. 그 중 가장 큰 붕괴는 사진에서 일어났다. 카메라를 삼켜버린 스마트폰은 카메라 시장도 파괴했다. 캐논, 니콘 등 카메라 업체들의 매출은 급감했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카메라를 만들던 삼성전자도 지난 2015년 카메라 시장에서 철수했다. 동네에 남아있는 사진관은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추억이자 희귀한 피사체가 됐다.

 

산업이 아닌 기억의 작동 방법도 바꾸어 놓았다. 콧구멍보다 작은 창으로(스마트폰 카메라 렌즈) 세상을 찍어내는 스마트폰 사진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 디지털 공간에 부유한다. 추억의 순간은 한 장의 사진으로 인화돼 사진첩에 꽂혔다.(그렇다, 인화된 사진은 마음에 꽂힌다.) 그러나 이제 사진은 언제 어디서든 나와 함께 동행한다. 추억된 과거를 지금 이 순간 여기로 불러내 과거의 순간을 되살린다. 과거의 내 모습은 내 아이폰(I-Phone : 그렇다, 아이폰은 공중전화, 가정용 전화도 아닌 내 전화기다)을 통해 얼굴수첩(Face Book)에 복사되고, 당신에게 꽂힌 튜브관(You Tube)을 타고 흐른다.

 

셀피selfie. 옥스포드 대학이 선정한 2013년 올해의 단어다. 내 사진은 인스타그램된다. INSTAGRAM=Instant camera+Telegram. 스마트폰 즉석카메라(Instant camera)에 찍힌 내 자화상은 스마트폰을 통해 전송(Telegram)된다. 좋아요가 많이 눌리고 공유가 많이 된 얼굴은 그야말라 STAR가 되기도 한다. 셀피 예쁘게 찍는 앵글도 일반화됐다. 실제의 나보다 어리게 보이도록 카메라 렌즈를 위로 들어올린다. 위에 있는 렌즈를 응시하면 깜찍하게, 눈을 감으면 수줍은 듯 어린 나의 모습이 찍힌다. 스마트폰 유저들은 그런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제주 협재 2016

 

 

유저들의 나르시시즘적 욕망은 스마트폰 카메라 기술이 충족시키고 있다. 콧구멍만해서 화각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스마트폰 카메라는 또 다른 콧구멍을 스마트폰에 단다. 듀얼 카메라(dual-camera)가 그것이다. 말 그대로 카메라 렌즈 두 개가 스마트폰에 장착됐다. 한 구멍은 화각이 넓은 배경만을, 한 구멍은 사람의 얼굴을 담는다. 배경 따로, 피사체 따로 찍어서 스마트폰이 한 장으로 합성한다. 스마트폰 사진은 이제 전문가용 DSLR카메라처럼 배경이 흐린 심도 낮은 인물사진을 담아낸다.

 

아이폰8을 기다리는 유저들은 10주년 기념 아이폰이 듀얼카메라를 장착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아이폰은 이미 7S플러스에 듀얼카메라를 꽂았다. 듀얼카메라를 애써 외면했던 경쟁사 삼성도 새로 출시될 갤럭시노트8에 듀얼을 적용할 것이라는 소문이다. 일부 과학기술 담당 기자들은 스마트폰의 듀얼카메라가 '인간의 두 눈' 처럼 세상을 더 그럴듯하게 구현할 것이라고 흥분한다.

 

듀얼카메라가 찍는 사진은 정말 사람의 두 눈처럼 사람이 인식하는 피사체의 모습을 제대로 담아내는 것일까? 작동 방식에서만 따져본다면 이나다. 그건 단지 합성사진일 뿐이다. 유저의 나르시시즘적 욕망만 충족시켜줄 장면만 생산해낸다. 언제 어디서나 쉽게, 그리고 예쁘게 '내가 그곳에서 좋은 추억을 만들었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증거 자료만 수집한다.

 

 

인 디 에어 (Up In The Air)

 

2009년에 나온 '조지 클루니' 주연 영화 '인 디 에어(Up In The Air)'에는 이런 장면이 반복해서 나온다. 1년 중 300일 이상을 타지를 돌아다니며 일을 하는 해고 전문가 조지 클루니가 여동생의 사진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는 장면이다. 여동생의 사진은 항상 그와 동행하지만 그는 가족들을 만나기를 꺼려한다. 혼자 먹는 기내식, 호텔방이 편안한 주인공이다. 반면, 여행할 처지가 못 되는 여동생은 남자 친구와 함께 찍힌 사진으로 이곳저곳을 떠돈다. 그리고 오빠가 있는 타지에서 그녀의 기념사진은 또 다른 기념사진을 찍는다. 마치 듀얼카메라의 합성사진처럼. 주인공 조지 클루니는 좀 귀찮지만 동생의 그런 부탁 정도만 들어 줄 수 있는 가족 관계를 유지한다. 정작 가족들과 함께 있던 그의 기념사진은 없다.

 

기술복제시대에서의 사진에 대한 생각을 기술한 문예평론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 예술가 모홀리 나기(Laszlo Moholy Naggy, 1895-1946)의 말에 기대어 미래를 걱정했다.

 

미래의 문맹자는 문자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사진을 모르는 사람이 될 것이다.”

 

너무 쉬운 사진이지만, 그 쉬운 것을 읽어내기란 어렵다. 사진의 출현으로 원본과 아우라의 상실을 아쉬워한 벤야민의 생각은 8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유효하다. 합성사진에 대한 이렇다할 거부감도 없는 지금의 분위기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별반 차이가 없다.

 

2017.6.

Posted by 김창길

출처 http://www.adamfergusonphoto.com

 

 

 

문재인 정부 출범 한 달이 훌쩍 넘었다. 커피를 들고 청와대 경내를 거니는 대통령과 참모진의 모습이 언론에 공개됐다. 권위를 벗어버린 대한민국 최고 권력의 색다른 모습이었다. 사진 한 장이 모든 것을 설명해 주지는 않지만, 대부분을 설명해줬다. 반응은 우호적이었다.

 

문재인 대통령 사진에 대한 요란한 잡음도 있었다. 당선 이전에 찍힌 대통령의 인물사진을 표지에 게재한 국내외 주간지에 대한 비교가 그것이다. 한겨레21 1162호(5월22일자)와 타임지 아시아판이 커버스토리로 문재인 대통령의 얼굴 사진을 실었다. 문 대통령을 지지하는 몇몇 사람들이 한겨레21 표지에 실린 대통령 사진에 대한 쓴소리를 쏟아냈다. 반면 타임지에 실린 문 대통령의 사진은 괜찮다는 반응이다. 문 대통령 커버사진이 수록된 타임지는 베스트셀러처럼 불티나게 팔렸다. 혹자는 타임지가 잘 팔리니까 한겨레21이 흉내내서 돈을 벌고 싶었던 것 아니냐는 비난도 했다.

 

두 주간지 표지사진에 대한 호불호는 표지 사진 그 자체 보다는 진보 언론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 안에서 진행된 측면이 강하다. 대선 기간 한겨레21에 실렸던 이재명·안희정 후보 등의 사진과도 비교하며 한겨레21의 표지사진을 평가했다. 논쟁은 과거 고 노무현 전대통령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이미지 자체보다는 진보 언론이 작동하는 방식을 문제 삼았다. 이 방식 안에서는 사진이, 그 문제에 대한 자료사진이자 증명사진으로 첨부됐을 뿐이다. 사진 안의 내용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다.


 

사진은 늘 그랬다. 같은 장면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했다. 그것이 사진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어떤 상황에서 떨어져 나온 단 한 장의 사진이 갖는 모호성 때문이다. 전후 맥락을 상실한 사진 한 장은 해석이 열려있다. 하지만 사진이 다시 어떤 맥락에 들어가면 특정 의미를 부여 받는다. 부유하는 이미지를 고정시킬 수 있는 맥락이 필요하다. 가령, 명확한 일간신문의 사진조차 오독의 여지가 있다. 문자 텍스트인 ‘사진설명’을 써놓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겨레21 1162호

 

 

 

그 ‘어떤 맥락’에 들어가지 않고, 한겨레21과 타임지 표지사진을 인물 사진이라는 표현기법에 따라 다시 들여다 봤다. 문 대통령을 좋아하는 일부 사람들의 지적처럼 한겨레21의 사진은 악의적인 의도가 있었던 것일까?


 

한겨레21 사진은 사진기자가 아래에서 문 대통령을 위로 올려다본 앵글이다. 어떤 독자의 지적처럼 인물사진의 로우 앵글은 피사체에게 권위를 풍기게 한다. 쉽게 말해 어린이가 어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한겨레21 표지사진을 문제 삼는 일부의 지적은 이러하다. 문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처럼 권위적인 사람이 아닌데 한겨레21인 로우 앵글을 구사해 문 대통령을 권위적으로 표지에 내밀었다는 것. 부분적으로 옳다. 하지만 권위를 풍기는 것과 권위적인 것은 좀 다르다. ‘권위’는 스스로 그러한 풍모를, ‘권위적’인 것은 다소 권력 지향적이라는 뉘앙스를 포함한다. 그 느낌은 사진을 바라보는 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어느 정도 변형된다.

 

한겨레21 사진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본다. 만약 로우 앵글인 대통령의 시선이 독자들을 향했다면 어떤 느낌일까? 독자 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문 대통령이 독자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그 장면은 확실히 권위적이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의 시선은 독자가 아닌 먼 곳을 쳐다보고 있다. 마치 새 정부를 출범시켜 해야 할 일이 저 너머에 많이 있다는 듯. 사진 앵글만 보자면 한겨레21의 표지사진은 약간의 권위를 풍길 수는 있겠으나, 역대 대통령처럼 권위적이라고 못 박기에는 부족한 듯하다.

 

타임지 사진을 다시 본다. 정면 사진이다. 사진가와 문 대통령의 시선 높이가 동일하다. 비슷한 신장의 성인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상황이다. 서부 영화의 대결 장면이 될 수도 있다. 두 카우보이는 허리춤에 찬 권총에 손을 얹고 서로를 응시한다. 누군가 총을 뽑는 순간 다른 사람도 총을 뽑는 상황이다. 긴장할 수 밖에 없다. 문 대통령은 ‘나는 당신이 바라보고 있는 그 문재인입니다’라고 말을 건다. 내가 나를 보여줬으니 당신도 나에게 답하라는 표정이다. 불편해서 계속 바라보기 힘든 분위기가 흐른다.

 

피사체가 카메라를 응시하는 인물사진은 사진의 한 속성인 관음증을 유발시킬 공간을 축소시킨다. 길거리를 걷다가 마음에 드는 이성을 힐끗힐끗 쳐다보다 정작 그 피사체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게 되면 고개를 떨구게 되는 그런 상황이다. 반면 한겨레21의 문 대통령은 독자를 바라보지 않는다. 독자는 자기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문 대통령을 구경한다. 카메라 뒤에 숨은 독자들은 맘 놓고 문 대통령을 바라보며 그 이미지를 평가한다. 하지만 타임지 표지의 정면 사진은 독자와 문 대통령이 1대1 상황이다. 당신이 나를 평가하는 순간 나도 응수할테니 맘 놓고 있지 말라는 설정이다. 머릿속이 복잡한 독자들은 주저한다. 단지 사진이 좀 어둡게 나오지 않았냐고 자세를 낮춘다.

 

 

http://www.adamfergusonphoto.com/afghans/ 아프가니스탄 포트레이트

 

 

타임지 문 대통령의 사진은 확실히 어두운 톤이다. 호주 태생 아담 퍼거슨(Adam Ferguson, 1978~)이 찍은 사진이다. 그의 홈페이지를 들여다 봤다. 이라크, 요르단, 이스라엘 등 분쟁 지역에서 찍은 인물 사진들 대부분이 어두운 톤이다. 때문에, 퍼거슨이 촬영한 문 대통령 사진은 정치적인 어떤 선입견이 작용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작가 스타일의 연장선이다. 배경이 어두우면 얼굴의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그 이상으로 어둡게 만든다. 결국 얼굴 형체도 어둠에 묻힌다. 다만 문재인 대통령의 타임지 사진은 윤곽이 사라질 정도는 아니다. 좀 더 많은 빛을 받아들였다.

 

한겨례21 표지사즌으로 돌아간다. 자연광이다. 쾌청하고 푸른 하늘 아래서 문재인 대통령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연일 계속된 야외 유세로 검붉게 타버린 살갖의 흔적도 드러났다. 강렬한 태양빛은 대통령의 안경테에 그림자를 만들었고 굳게 다문 입술 언저리에도 그늘이 생겼다. 강령한 태양은 부드러운 느낌을 몰아냈다.  

 

맥락에 들어가봤다. 아담 퍼거슨은 이방인이다. 커버스토리도 김정은을 상대할 남한의 지도자에 초점을 맞춘다. 대선구도가 아닌 남북구도다. 이방인은 그 남쪽의 지도자를 정면으로 세운다. 사진작가는 카메라 뒤에 숨어서 셔터를 누른다. 북한도 난해하지만, 북한을 상대하는 남쪽의 지도자를 해석하기도 어렵다는 것을 작가는 안다. 그는 남쪽 지도자에게 마이크를 건낸다.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라며. 작가는 다만 구릿빛 색깔만 구현한다. 장밋빛이 아닌 어두운 구릿빛을.

 

 

 

 

타임지 표지 사진에 대한 일화 하나를 더 소개한다. 미식축구 슈퍼스타였던 OJ 심슨(O.J. Simpson) 표지사진이다. 1994년 전처를 살해한 용의자 심슨의 머그샷(경찰서에서 찍는 용의자 정면 사진) 사진을 타임지가 표지에 내밀었다. 문제는 또다시 사진 밝기. 경찰서에서 제공한 심슨 머그샷을 뉴스위크지도 표지로 내밀었는데, 똑같은 머그샷 사진이 타임지에서는 훨씬 어둡게 인쇄됐다. 머그샷 원본 사진을 타임지에서 의도적으로 어둡게 수정한 것이다. 이는 보도사진 역사에서 대표적인 사진 왜곡에 대한 한 사례로 손꼽힌다. 

2017. 6.

Posted by 김창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