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기자들이 마누라만큼 자주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취재차를 운전하시는 분들이죠. 나이가 많으시면 작은 아빠, 좀 젊다 싶으면 큰 삼촌만큼 나이 지긎하신 분들입니다. 현장에 있어야만 하는 사진기자들을 취재 최전선으로 진입시켜 주시는 분들이죠. 지방에 갈 때면 잠자리도, 배고픔도 같이 느끼면서 뉴스를 생산해내는 숨은 일꾼들입니다. 그러다보니 가끔 속 깊은 이야기도 합니다.

 

"아이고, 벌써 찬바람이 부네."

"그러게요, 형님 옆에 두고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시간 참 빨리 가요."

"하루 하루는 늦게 가. 근데 한 해는 이리도 빨리 가는지."

"운전하다 위험할 때 형님이 급 브레이크 밟아버리듯이 멈출 방법은 없어요?"

"브레이크 밟으려고 발버둥쳤는데 지금 이모양이 됐네."

 

짧은 대화였지만, 몸이 말하는 언어였습니다. 그리고 그리스인 조르바가 떠올랐습니다.

 

'두목, 내가 어렸을 때 내일이면 죽을 것 같은 한 노인네가 밭을 갈고 있는 걸 보았어요. 그래서 물어봤죠. 결실을 못 볼수도 있는데 뭘 그리 열심히 밭을 일구시냐고. 그러자 그 노인이 대답했어요. 난 항상 100년을 살 것처럼 하루 하루를 산다네. 그래서 내가 그 노인네한테 대답했죠. 나는 내일 죽는다 생각하고 오늘을 산다고.'

 

어쩌면 살아간다는 것이 모범 답안을 따라하는 것이 정답이 아닐 수도 있을것 같습니다. 조르바처럼 이것 저것 따지지 않고 지금 이순간에 충실한 것이 오히려 정답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기적이고 찰나적이기에 영원히 정답이 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래서 2017년에 찍은 사진들을 되돌아 봤습니다. 정답이 아닌 B컷으로요.

 

 

 

 

지난 2월에 찍은 사진입니다. 거짓말하는 피의자, 거짓말할 줄 모르는 그의 등. 대한민국을 쥐락펴락하던 한 사내의 초라한 뒷모습입니다. 아직도 그의 몸은 오랏줄에 묶여 있습니다.

 

 

 

 

 

 

3월에 찍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모습입니다. 대통령은 탄핵됐고, 초상화가 걸릴 자리는 아직 빈 자리로 남아있었습니다.

 

 

 

 

7월 일본군위안부해결을위한 정기수요집회 사진입니다. 외국인 여성활동가들이 집회에 참가했죠. 우리네 할머니를 '그랜드 머더'가 아닌 '할모니'로 쓴 손 피켓이 애잔했습니다.

 

 

 

 

 

혹한기 만큼 힘든 혹서기인 7월 말의 풍경입니다. 몸은 더웠지만 눈은 시원했던 순간이죠.

 

 

 

 

정전협정 64주년인 7월 27일 판문점의 모습입니다. 64년이나 흘렀으니 이제 정전이나, 휴전이 아닌 평화협정이 쳬결되기를 고대합니다.

 

 

 

 

 

10월의 그날은 전형적인 가을 하늘이 열렸습니다. 마치 마른 걸레로 닦아놓은 하늘 같았죠.

 

 

 

 

작년 가을부터 단풍을 쳐다보기 싫었습니다. 곱게 물든 단풍에 감상에 젖는 내 나이가 싫었기 때문이죠.

 

 

 

 

 

문제의 사진입니다. 취재차를 운전하는 형님과 이야기하며 그리스인 조르바를 떠올린 그 즈음이었죠. 별수 있겠나요? 나이는 악마나 물어가라고 호탕하게 말해야겠죠!

 

 

201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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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창길

 

 

겨울을 목전에 두고 가을 사진 세 장을 꺼냅니다.

 

 

 

 

가을이 겨울에 내려 앉았네

잿빛 겨울로 들어서는 길목에 색의 향연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만추(晩秋)의 삼원색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붉은빛과 주홍빛, 그리고 노란색이 제 몸 바스러지는 줄도 모르고 색을 태우고 있습니다. 

성미 급한 겨울 바람이 만추의 삼원색을 시샘합니다. 색의 잔치를 빨리 끝내라며 나뭇가지를 흔들어댔습니다. 후드득 떨어지는 낙엽처럼 제 마음도 덜컹 내려앉았습니다. 아직 가을의 고운 빛깔들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래도 영원히 붙잡아 둘 수는 없겠죠? 영하의 바람을 감당할 수 없었던 은행 단풍 하나가 회색빛 코트 털뭉치 둥지에 내려앉았습니다. 가을은 그렇게 잿빛 겨울에 내려앉고 있었습니다. 

2017. 11. 16. 정동

 

 

 

 

 

 

 

 

 

낙엽 지는 소리

큰일 났습니다. 단풍 좋아하면 나이 들었다는 증거라는데, 속절없는 제 발길은 울긋불긋 물들고 있는 정동길을 따라 걷고 있었습니다. 

야단났습니다. 나이 들면 낙엽 지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는데, 우박 떨어지는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바스락거리는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멈칫멈칫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낙엽 굴러가는 소리에 웃었던 나이는 언제 지나가버렸는지도 기억 속에 희미합니다. 무대조명처럼 그늘을 뚫고 떨어진 빛줄기, 붉은 낙엽이 더 도드라져 보입니다.

2017. 11. 3. 정동

 

 

 

 

 

 

 

 

 

 

가을 하늘 닦다
이른 아침부터 하늘이 파랬습니다. 회색빛 빌딩 숲에 갇혀 있지만 고개를 들면 마천루가 잡아먹지 못한 파란 하늘이 펼쳐집니다.
"저 파란 가을 하늘을 손으로 잡아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서울 상암동의 한 빌딩 앞에 물방울 모양의 조형물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볼록 거울처럼 생긴 조형물에 파란 가을 하늘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죠. 손으로 잡을 수 없는 가을 하늘을 환경미화원이 깨끗하게 닦고 있었습니다.
2017. 10. 23. 상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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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창길
TAG 가을

 

 

 

서울 광화문광장 세월호 농성장 2017. 1. 4.

 

 

201719일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1000일째 되는 날이다.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촛불집회가 열리지 않는 평일 저녁인 지난 4일 서울 광화문광장 세월호 농성장의 모습은 예전과 달랐다. 무심히 지나치던 시민들은 광장에 멈춰 서서 세월호 참사 조형물들을 유심히 관찰하며 사진을 찍었다. 10차례 대규모로 진행된 촛불집회가 바꿔놓은 풍경이었다.

 

 

 

서울 광화문광장 세월호 농성장 2017. 1. 4.

 

 

201719일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천막농성이 시작된 910일째 되는 날이다. 참사가 일어난 후 90일 되는 날(2014714), 유가족들은 광화문광장에서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국회에서 여야가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에 대한 조사권 부여 여부를 놓고 이견을 좁히지 못하자 유족들이 곡기를 끊은 것이다.

 

 

 

지난 2016년 12월 3일 열린 제 6차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박근혜 대통령 모형을 오랏줄에 묶고 청와대로 향하고 있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의 지지부진한 모습은 별도로 종교인, 교수, 극우언론 등의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비난은 그 이전부터 시작됐다. 경기도 안산 화랑유원지에 마련된 4.16기억저장소에는 夜叉(야차)’라고 적힌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야차는 불교에 등장하는 '하늘을 날아다니며 사람을 잡아먹고 상해를 입힌다는 잔인한 귀신'이다.

 

“(세월호 침몰사고가) 너무나 큰 불행이지만 국민 의식부터 재정비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꼭 불행한 것은 아니다.” (2014422일 송영선 전 새누리당 의원)

박근혜 대통령을 겨냥해 물러나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다른 뜻이 있는 것” (2014425일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

유가족이 무슨 벼슬 딴 것처럼 쌩 난리 친다. 세월호 유가족에게는 국민의 혈세 한 푼도 주어서는 안 된다.” (2014511일 김호월 홍익대 광고홍보대학원 교수)

 

세월호 가족들에게 깊은 상처를 준 야차는 2014년 5월 이후로 강도를 높여 갔다.

 

 

 

지난 2016년 12월 3일 열린 제 6차 촛불집회에 참가한 한 시민이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횃불을 들고 있다. 가이 포크스(1570-1606)는 카톨릭 탄압에 저항하며 '화약음모 사건'을 일으킨 영국인. 제임스 1세가 카톨릭을 탄압하자 1605년 11월 5일 웨스트민스터 궁 지하에 화약을 설치했으나 발각되어 화형당했다.

 

 

 

세월호 참사 1000일을 이틀 앞둔 201717,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제11차 촛불집회가 열렸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 304명에 대한 시민들의 묵념으로 시작된 촛불집회가 시작됐고, 광화문광장 하늘에는 노란 풍선들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세월호 참사 1000일을 의미하는 1000개의 노란 풍선이다.

 

 

 

서울 광화문광장 세월호 농성장 기억의 문. 2017.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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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창길

1000일 동안...

photo story 2017.01.03 13:56

 

 

 

 

 

2016년의 마지막 날 오후 7시에 시작해 2017년 새해 첫 날 새벽까지 이어진 제10차 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축포를 터트리고 있다. 집회 주최측인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은 제10차 촛불집회를 ‘송박영신(送朴迎新) 범국민행동의 날’로 정했다. 송박영신은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는 뜻인 송구영신(送舊迎新)에 박 대통령 성을 넣은 집회용 조어다.

 

 

 

 

 

 

우리나라 집회 현장에 본격적으로 촛불이 등장한 때는 지난 2002년 부터였다고 한다. 미군 장갑차에 깔려 사망한 미선이 효순이를 추모하기 위해서다. 당시 한국 정부는 무능했고, 미국 정부는 고압적이었다. 한일월드컵 때문에 국민적 관심에서도 벗어났다.

 

 

 

 

 

 

대중들의 머릿속에 각인된 촛불은 지난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를 불지른 촛불이었다. 장노출(길게 셔터 막을 열어놓음)로 찍은 촛불의 모습이 붉은 물줄기를 만들어 광화문으로 향하는 장면을 사진기자들은 표현했다. 이후 크고 작은 집회에 촛불은 야간 집회 도구의 단골 메뉴였다.

 

 

 

 

 

 

박근혜 대통령 퇴진 첫 촛불집회에 지난해 10월 29일, 집회 장소인 청계광장에 도착한 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누적 인원 1천만명을 돌파한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정권 퇴진을 외치는 첫 집회에 그렇게 많은 인원이 나오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많은 인파로 집회 본무대에 접근하지 못한 채 주변을 멤돌다 발을 동동 구른 기억이다.

 

 

 

 

 

 

오는 1월 9일은 세월호 참사 1000일 되는 날이다.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제11차 촛불집회는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는 방향으로 기획된다고 한다. 1000일 동안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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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창길



예테보리 스텐피린 부둣가에서 자전거를 타던 시민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스톡홀름에 이은 스웨덴 제2의 도시 예테보리(Gothenburg)는 예타강이 흐르는 수변도시다. 북방의 사자로 불렸던 '구스타브 아돌프 2'17세기에 만든 도시다. 유럽에서는 '예테보리' 보다는 '고텐부르크'라고 많이 부르는데, 고텐부르크는 북방 게르만족인 고트족이 사는 성이란 뜻이다. 8월의 예테보리는 상쾌했다. 트램이나 배를 타고 둘러보기 좋다.




시청 앞에 서 있는 구스타프 아돌프 왕이 이곳에 도시를 세우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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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해를 잇는 예타강변에는 오랜지색 크레인들이 불쑥불쑥 ™솟아있다. ''자를 세로로 세운 모양의 거대한 갠트리크레인도 하나 남아있다. 예테보리는 1970년대 세계 두번째로 큰 조선업 지대였다. 4개의 조선소 공장 굴뜩에서는 검은 연기를 연신 내뿜어 예테보리의 하늘을 검은색으로 물들였다. 지옥으로 가기 전의 도시라고까지 불렸다.




예테보리




승승장구를 구가하던 예테보리 조선업은 두 차례에 걸친 석유파동으로 곤두박질쳤다. 또, 무섭게 따라오는 한국과 일본 조선업에 경쟁력을 잃어갔다. 주요 선종인 유조선 수요가 급감하자 전체 조선업 노동자의 5분의 1일 실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스웨덴 정부는 몰락 직전의 조선소와 노동자들을 살리기 위해 조선업의 국유화를 단행했다. 지역 조선소들을 합병해 덩치를 키웠지만 조선업의 몰락은 막을 수 없었다.




번지 점프 대회가 열렸던 갠트리 크레인




현재의 예테보리 도시에는 조선소가 없다. 도시는 지식집약형 미래도시로 탈바꿈했다. 문을 닫은 조선소 부지에 린돌먼 과학단지를 만들고, 공장으로 쓰던 건물은 호텔과 카페로 만들었다. 조선소 도크시설은 요트 선착장으로 바뀌었다. 주민 회의를 통해 남겨둔 에릭스버그(Erigsburg) 크레인에서는 몇해 전 번지점프 대회도 열렸다고 한다.

조선소의 크레인 운명을 주민들이 결정했다? 한국인 정서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예테보리가 지식산업기반의 수변도시로 탈바꿈했던 것은 모두 주민들의 오랜 회의를 통해 결정된 것이란다. 공항도 그랬고, 사드 후보지로 홍역을 앓고 있는 우리 나라의 모습이 많이 부끄럽다.  




립스틱 빌딩과 범선. 바이킹이라 불리는 이 초대형 범선은 호텔과 레스토랑으로 쓰인다.




예타강변 릴라 붐멘(Lilla Bommen) 지역에는 도시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고층빌딩이 있다. 립스틱 모양으로 생겼다고 립스틱빌딩이라 불린다. 예테보리에서 제일 높은 빌딩인데 겨우 22층이다. 그만큼 예테보리의 빌딩들은 고층 빌딩이 없다. 고층 빌딩이 없어 예타강을 품고 있는 수변도시 예테보리는 편안한 느낌이다. 입장료가 없는 예타강 북쪽의 케일러스 공원(Keillers Park) 정상에서도 도심을 내려다볼 수 있다.




다양하고 화사한 색깔의 아파트가 예타강변을 따라 이어진다.




립스틱 빌딩 아래는 많은 요트들이 모여 있는 선착장이 있다. 이곳에서 배를 타고 도시를 둘러보는 Hop On Hop Off 투어가 가능하다. 예타강은 물론, 도심을 파고드는 운하를 따라 예테보리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배는 한쪽으로만 이동하고 바우처를 구입하면 다섯 군데의 정박지에서 마음데로 승하선할 수 있다. 배 운전수가 뒤쪽에서 운전하고, 선미에서는 가이드가 영어로 예테보리를 설명한다.





운하를 따라 가는 Hop On Hop Off 투어




시간과 체력이 허락된다면 강변을 따라 도심을 둘러봐도 좋다. 특히 강북의 에릭스버그 주변 지역은 공장 외관을 갖고 있는 이색적인 호텔과 카페를 구경할 수 있다. 컨테이너항 근처에는 볼보 박물관도 있다. 볼보는 1927년 예테보리에서 탄생했다.




해양박물관 부둣가에 전시된 다양한 배들.




예테보리 도심 곳곳을 누비는 트램



스웨덴 예테보리 201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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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창길

 

 

 

5년만인 2016년에 복원된 덴마크 오덴세 래드바이 바이킹 배.

 

 

 

13세기에 몽골족이 유라시아 대륙을 평정했다면, 그보다 앞선 시기에 바이킹은 유럽을 넘어 중앙아시아까지 접수했다. 몽골족이 뛰어난 기마술로 전쟁에서 승리했다면, 바이킹의 기동력은 그들만의 특출한 항해술. 앞뒤 배모양이 비슷해 전진 후진이 자유롭고, 날렵한 선체는 파도를 빠르게 갈랐다.  8세기부터 11세기까지 북유럽은 물론, 서유럽, 북아메리카, 중앙아시아까지 바이킹이 활약하던 시기를 바이킹 시대(Viking Ager)라 부른다.

 

1935년 덴마크 제3의 도시 오덴세(Odense) 동쪽에서 바이킹 무덤이 발견됐다. 몇 척의 바이킹 배는 발견됐지만, 바이킹 무덤이 발견된 적은 없었다. 무덤과 그 주변은 바이킹 박물관, 래드바이 바이킹 뮤지엄(Ladby Viking Museum)이 됐다.

 

 

바이킹 배를 복원하기 위해 사용하던 나무와 공구들이 케르테민데 피오르드 해안가에 놓여져 있다. 

 

 

일단, 널리 퍼져 있는 바이킹에 대한 오해부터 풀고 박물관을 살펴보자.

 

첫 번, 바이킹은 여러 삽화나 만화에 나온 것처럼 뿔 달린 투구를 쓰고 다녔다?

바다의 약탈자, 바이킹 투구에는 뿔이 없었다. 19세기 고대 그리스 로마 연대기 작가들이 날조한 바이킹의 이미지가 지금까지 지워지지 않고 있다. 다만 바이킹 시대 이전에는 노르만족과 게르만족 성직자들이 특별한 의식을 치를 때 뿔 달린 투구를 썼다.

 

두 번째, 바이킹은 노략질일 일삼는 야만인이다?

맞다. 그들은 잔혹하고 악랄한 해적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야만인은 아니었다. 바이킹은 지금 표현을 빌리지만 꽃미남들이다. 출토된 바이킹 유물에서는 면도기, , 핀셋 등이 발견됐다. 당시 다른 유럽 남자들은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르고 위생상태도 좋지 못했다. 면도는 돈 많은 귀족층이나 즐길 수 있는 호사. 깔끔한 바이킹 사내들은 금발을 최고로 여겼다. 갈색 머리를 가진 바이킹 남자들은 탈색제를 사용해 머리 색깔도 바꿨다. 금발의 바이킹 사내는 영국 여자들이 홀딱 반할 정도로 멋졌다고 전해진다.

 

 

 

 

박물관에 전시된 바이킹 사내들이 입고 다녔던 비단 망토. 마네킹 옆에 잘 생긴 바이킹 초상화도 걸렸다.

 

 

 

세 번째, 바이킹은 해적질만 했다?

아니다. 바이킹은 배를 타지 않는 대부분의 시간에 가축들을 기르고 농사를 지었다. 여가 시간에는 스키도 즐길 줄 알았다. , 배를 타는 목적이 약탈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다. 바이킹은 유능한 상인이기도 했다. 그들은 가축의 가죽과, 그들의 수공품들, 그리고 노예까지 거래했다.

바이킹 공동체에서 수공업자들의 대우는 좋았다. 그들의 솜씨가 훌륭했기 때문. 바이킹의 수공예품은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철을 가공하는 실력도 뛰어나 품질 좋은 명검을 생산하기도 했다. 바이킹이 전투를 잘 했던 이유는 이 단단한 철검도 한몫 한다. 

 

네 번째, 바이킹 사회는 마초적이다?

바이킹 사회는 당시 다른 유럽보다 여성의 지위가 월등히 높았다. 우선, 바이킹 여성들은 남성들처럼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다. 또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혼을 요구할 수 있었다. 이혼을 하면 결혼 지참금까지 다시 가져갔다.

 

 

 

박물관에 전시된 목걸이와 장신구로 치장한 바이킹 여성들 초상화

 

 

 

박물관이라고 부르기는 다소 작은 건물에는 바이킹 유물들이 아기자기하게 전시돼 있다. 은 벨트, 은 그릇, , 망치, 도끼, 금 장신구들.

특이한 건, 고증을 통해 그린 바이킹의 초상화와 바이킹 패션. 물론, 바이킹 내 상류층을 형상화했겠지만 해적이라고 상상하기에는 너무 고귀한 이미지가 흘렀다. 마네킹이 입고 있는 바이킹의 비단 망토를 보니 정말 영국 여자들이 홀딱 반할만한 패션이었다.

 

 

 

박물관에서 자원봉사자들이 바이킹 이야기를 천에 수놓는 작업을 하고 있다.

 

 

전시관을 둘러본 후 밀밭을 지나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바이킹 무덤이 나온다. 우리나라 왕릉만한 크기의 어두운 무덤 속에는 래드바이(Laday) 족장의 사체가 있던 배가 전시돼 있다. 배에는 11마리의 말과 3-4마리의 개 유골도 실려 있다. 다만 족장의 사체는 없는데, 고고학자들은 바이킹 시대 때 래드바이 족장과 적대적인 바이킹들이 시신을 유기 훼손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바이킹 장례문화는 족장이 그가 쓰 물건들과, 동물, 노예와 함께 족장의 시신을 배에 태워 무덤에 묻는다. 족장은 죽어서도 사후 세계를 향해 항해한다.

 

 

 

바이킹 무덤 안에 전시된 바이킹 배

 

 

 

바이킹은 단일 종족이 아니다. 배를 타고 노략질과 침략, 무역을 하던 노르만족(지금의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해적들을 바이킹이라 통칭했다. 바이킹은 아이슬란드를 거쳐 북아메리카에까지 진출한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 500년 전, 바이킹은 이미 아메리카에 발을 내딛었다. 비록 정착에는 실패했지만.

유럽과 러시아에는 바이킹 침입의 역사가 언어에 나타나 있다. 프랑스 서북부 노르망디(Normandie)는 노르만족 바이킹이 세운 공국이라 노르망디 공국이라 불렀다. 또 러시아(Russia)'Rus'는 스웨덴 고대어로 바이킹(Vikings)이다.

 

 

 

바이킹 무덤

 

 

 

무덤 밖에는 925년에 묻혀 형체만 남은 바이킹 배를 같은 크기로 복원한 래드바이 배가 있다. 지난 2011년부터 시작된 바이킹 배 복원 작업은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으로 올해 5월에 완성됐다. 옛 방식대로 배를 만들었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길이 21.5미터의 바이킹 배는 32명이 탑승할 수 있다. 물가에는 배 복원 작업에 사용됐던 장비들을 그대로 전시해 놨다.

 

용맹을 떨쳤던 바이킹은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유럽 세계에 녹아든다. 유럽 사람들의 눈에 비친 바이킹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도교 종족이었다. 우리나라 조상들이 주변 민족들을 오랑캐로 생각했듯이, 유럽 사람들도 노르만족을 야만인으로 깎아내렸다. 그런 마음이 입에는 개 거품을 물며 뿔 달린 투구를 쓰고 도적질하는 해적 이미지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바이킹 남자들은 영국 여자들이 홀딱 반할 정도로 멋쟁이였다.

 

 

 

 

2016. 8. 덴마크 오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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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창길




검은 땅 위에 미술관이 들어섰다. 1964년부터 38년간 석탄을 캐던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삼척탄좌는 38년만인 2001년 가동을 멈췄다. 그리고 12년 후에 그곳은 미술관으로 재탄생했다. 삼척탄좌 폐광시설에 들어선 삼탄아트마인이다.





삼탄아트마인은 삼척탄좌(삼탄) 폐광시설에서 예술(아트)를 창조하는 광산(마인)이다.  세계 곳곳에서 예술품을 수집하던 고 김민석 대표가 검은 공장을 미술관으로 리모델링했다. 그가 수집한 10만여점의 예술품을 전시했고, 작가들을 위한 창작공간도 마련했다. 현대미술도 전시하며 폐광시설을 활용한 기획전시를 이어가고 있다.








삼척탄좌 수직갱도 조차장이다. 광부들은 수직갱도 입구를 지옥의 문이라 불렀다. 지옥의 문에 들어선 광부들은 승강기를 타고 자하로 내려갔다. 50미터 간격으로 뚤려있는 수평갱에 하차한 광부들은 광차를 타고 막장으로 향했다.









지옥의 문에서 나온 광부들은 먼저 석탄가루 덕지덕지 붙은 장화를 세화장에서 씻었다. 광부들의 세화장에 하얀 웨딩드레스가 걸려 있다. 살림이 넉넉하지 않던 시절, 광부들에게 시집가는 새색시들이 공동으로 돌려 입던 드레스다.









광부들의 목욕탕에에 비너스 조각상이 설치돼 있다. 거품에서 탄생했다는 아름다운 여신이 광부들과 함께 목욕하고 있다.
목욕탕은 석탄산업 근로자들에게 중요한 복지시설이었다. 공동 목욕탕이 없던 시절에는 눈만 껌뻑이며 검둥이로 나온 광부들을 식구들도 알아볼 수 없었다. 아무리 씻어내도 남아있는 배꼽의 탄가루는 광부 아내의 배꼽에서도 흘러나왔다. 총각 광부 배꼽의 탄가루는 기생집 아가씨 배꼽에서 흘러 나왔다.








 

작업복 세탁기에서 광부 형상을 한 작업복이 걸어나오고 있다. 세탁기 또한 석탄산업 근로자들에게 큰 복지였다. 세탁기가 없던 시절, 광부들의 아내는 동네 냇가에서 작업복을 빨았다. 광부의 아이들은 원래 시냇물 색깔이 까만줄만 알았다.










광부 경쟁률이 10대 1이던 호시절도 있었다. 동네 개가 만원짜리를 물고 다니고, 운탄업자들이 돈을 삽으로 쓸어담았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하지만 동네에 앰블런스 소리가 울려퍼지면 탄광마을은 숙연해졌다. 오늘은 누구 아빠가 검은 가루에 묻힌 것일까?
막장은 24시간 가동됐다. 갑, 을, 병 3개조로 작업이 진행됐다. 야간 병조에 속한 광부들은 아침 해를 보며 지옥의 문을 나왔다. 삼겹살과 물닭갈비에 소주로 목구멍에 낀 탄가루를 씻어내리던 광부들은 3년만 일하고 떠나겠다고 큰소리쳤다. 하지만 그들은 막장을 떠나지 못했다. 씻어낸 줄 알았던 탄가루도 폐속에 달라붙어 진폐증을 남겼다.



1988년 347개에 달했던 전국의 탄광은 현재 5개만 남아있다.


2015. 12. 강원도 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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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창길

 

 

 

폐광산이 그대로 남아 체험관이 됐다. 광부들이 지옥의 문이라고 부르던 수직갱 조차장에서 어린이들이 손뼉치며 웃고 있다. 목욕탕, 탈의실, 세탁실은 광부들의 치열했던 검은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석탄역사체험관으로 탈바꿈한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동원탄좌 이야기다.

 

 

 

동원탄좌 석탄역사체험관에 눈이 내린다. 체험관 뒤로 56년동안 캐낸 석탄 폐석이 쌓여  검은 야산이 됐다.

 

 

 

"동원탄좌가 사라지면 사북 56년의 역사가 사라집니다."
석탄유물보존회 전주익 기획팀장이 동원탄좌 역사에 대해 운을 뗐다. 1948년 채탄을 시작한 동원탄좌는 아시아 민영 최대의 석탄회사였다. 두 차례 오일 파동으로 에너지 수급이 어려워지자 정부는 광부를 산업전사라 칭송했다. 한 때 5000명이 넘는 직원들이 석탄으로 먹고 살았다. 동네 개도 만원 짜리를 물고 다니고, 운탄업자들은 포대에 돈을 쓸어모았던 시절도 있었다.
"사북은 탄광 노동운동의 중심지입니다."
1980년 사북항쟁이 일어났다.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일하던 탄광 노동자들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당시 광부들의 월급체계는 도급제였다. 생산량만큼 월급이 책정되는 방식. 경영주편을 든 관리직 종사자들은 꼬투리를 잡고 광부들의 노동량을 가볍게 책정했다. 부당한 월급체계는 사측 입장에 동조하는 어용노조의 도움으로 지속됐다.
4월 18일 광부들은 노조지부장 부정선거의혹을 둘러싸고 집회를 열기로 했다. 하지만 집회 불허를 통보받은 광부들은 분개했다. 3일 후 21일 광부들을 사찰하던 사복 경찰관이 발각돼, 광부들을 치고 달아나는 사고가 발생했다. 교통사고로 흥분한 광부들은 사북의 주요 건물들을 습격하고 기물을 파괴했다. 3일 후인 24일 노, 사, 정 대표가 합의하며 사태는 일단락되는듯 했다.
사북을 지켜보던 전두환 계엄사령부는 이 사건을 '광부난동사건'으로 규정했다. 사북사건 합동수사단은 4.24합의를 깨고 200여명의 광부와 주민들을 연행하며 군홧발로 짓밟았다. 검찰은 31명을 구속 기소하고 81명을 군법회의에 송치했다. 이원갑씨 등 7명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녹슨 궤도에 멈춰선 광부들의 인차에 눈이 내린다. 1칸 8명씩 타고 수천미터 막장에 들어가는데 1시간이다. 광산은 갑, 을, 병 3개조로 24시간 채탄작업이 이루어졌다.

 

 

 "검은 가루는 아무리 씻어내도 배꼽에 남아 있었습니다. 광부들의 아내 배꼽에도, 서울옥 아가씨 배꼽에도 탄가루가 묻어나왔죠"
사북항쟁, 3.3투쟁 등 사북의 역사를 정리해놓은 뿌리관을 지키던 퇴역 광부가 옛 마을 이야기를 들려줬다. 첩첩산중인 사북의 물가는 도시보다 비쌌다. 태백에서 3벌하는 옷 값이 정선 사북에서는 1벌 값이었다. 그 만큼 오기 힘든 곳이었다. 광산이 잘 나갈때는 남편 고생 모르고 돈을 펑펑 쓰는 아내들도 있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광부 아내들의 막장 체험이다. 지옥같은 막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광부들의 아내는 마음을 고쳐잡았다.
"광부의 아내들도 막장에 들어가면 눈씨울이 붉어졌죠"

 

 

 

 

하얀 눈만 껌뻑이며 검둥이가 된 광부들은 장화를 먼저 씻었다. 동원탄좌 세화장이 2004년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1995년 주민 단위로 일어난 3.3투쟁은 폐광지역 산업시설개발에관한 특별법을 만들었다. 1988년 347개에 달하던 전국의 탄광들은 1994년에는 대형탄광 10여개만 남았다. 폐광촌에 실업자가 넘쳐났고, 지역 경제는 무너졌다. 검은 숨결이 끊어지는 상황에 사북 주민들은 힘을 모았다. 대정부 투쟁을 벌여 끝내 폐특법을 만들어냈다. 카지노를 기반으로 만든 강원랜드가 사북 검은 산 위에 들어섰다.
"흘러간 모든 것들이 유물이 된느 거 아닙니까?" 
리조트가 사북에 들어서자 주민들도 검은 도시에서 벗어나려했다. 탄가루 날리는 광산을 없애자는 것이다. 하지만 석탄시설이 사라지면 피땀흘렸던 광부들의 흔적도 없어질 것이라는 목소리도 들려왔다. 퇴역 광부들은 석탄유물보존회를 결성했다. 동원탄좌의 산업시설들을 지키기로 뜻을 모았다.

 

 

 

광부복을 나누어주던 작업복실에 서양미인들의 사진이 걸려있다. 석탄산업이 활황일 적, 사북에 다녀와야 진정한 기생이 된다는 말도 떠돌았다고 전해진다.

 

 

동원탄좌 석탄역사체험관은 5명의 퇴역광부가 지키고 있다. 홈페이지도 없고, 특별히 홍보활동을 하지 않아도 입소문을 타고 찾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지난 2004년 멈춘 동원탄좌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2015. 12. 사북 동원탄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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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창길

 

 

 

판교 차부상회

 

 

충남 서천군 판교면 현암리를 다녀왔다. 얼마 남지 않은 차부집을 찾기 위해서.

기차 간이역처럼 시골의 작은 버스 터미널이 차부집이다. 버스표를 판다. 버스표 판매는 부업이다. 잡화점, 방앗간, 약방, 음식점 등 마을에서 길목 좋은 곳에서 장사하던 가게에서 버스표를 팔았다. 버스가 정차하기 좋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작은 터미널이 된 것이다.

 

 

 

 

영화관으로 사용하던 건물. 영화관이 신통치않아 호신술도 가르쳤던 모양이다.

 

 

판교면 현암리는 작은 시골마을이지만 영화관이 있을 정도로 잘 나가는 읍내였다. 판교역이 이전되고 우시장이 사라지자 사람들의 발길을 끊겼다. 사람이 오고가야 돈도 도는 법이다. 장사하기 녹록하지 않자 가게를 운영하던 사람들은 마을을 떠났다. 활력소가 될만한 어떤 계기를 찾지 못했기에 빈 가게들은 영화 세트장처럼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채 그래도 남겨져 있다.

 

 

 

 

 

 

간판들은 빛이 바랬다. 소문난 의원은 못 고치는 병이 없나보다. 내과, 외과, 소아과, 비뇨기과, 피부과, 골다공증 모두 치료한다고 간판을 내걸었다. 명의로 소문나 소문난 의원이었나? 보건약국이란 약방 이름이 꽤 믿음직스럽다.

 

 

 

 

 

 

재잘되는 참새들을 따라가봤더니 정미소가 나왔다. 이것도 버려진 건물이겠거니 했지만 기계돌아가는 소리가 제법 요란하다.

 

 

 

 

 

옛날에는 정말 닭 한마리를 통째로 튀겼다. 그래서 통닭이다.

 

 

 

 

사진관이라 그런지, 페인트 색깔이 아직까지도 산뜻하다. 파스텔톤 사진관 앞 고무다라 화분에서는 계속 생명을 키워내고 있다.

 

 

2015. 9. 판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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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창길

 

 

 

 

충북 영동군 양산차부슈퍼

 

 

 

버스 옆구리를 쾅쾅 두드리며 ‘오라이’를 외치던 그때 그 버스 안내양은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현금처럼 버스표를 받아주던 학교 앞 분식점은 아직도 떡볶이를 팔고 있을까? 10장이 한꺼번에 인쇄된 버스표를 교묘하게 잘라 11장을 만들었던 학교 친구는 잘살고 있을까? 반쯤 찢은 버스표를 내고도 들키지 않았다며 자랑하던 친구였는데….

 

시골에는 버스표를 팔던 가판대가 없었다. 버스가 정차하기 좋은 길목에서 장사를 하는 식당, 방앗간, 잡화점, 이발소에서 버스표를 팔았다. 이런 가게를 차부집이라 불렀다. 차부(車部)는 차가 출발하고 도착하는 터미널이란 뜻이다. 차부집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떠올리는 옛 풍경은 사람들로 북적이던 버스정류소다.

 

 

충남 천안시 동남구 천안차부슈퍼

 

 

 

“카드가 더 싸니까 버스표가 안 팔리지.”

충북 영동군 양산면 가곡리 마을 나들목에 있는 양산차부슈퍼는 3년 전부터 버스표를 팔지 않는다. 교통카드 할인율 때문에 사람들이 더 이상 버스표를 찾지 않기 때문이다. 제법 큰 규모의 상점인데도 물건들은 별로 없다. 채소, 청과, 생선을 판다는 차부슈퍼의 간판은 빛이 바래가고 있었다. 가게 바로 앞에 생겨난 농협하나로마트 때문이다.

 

 

 

 

충남 서천군 판교차부상회

 

 

 

천안차부슈퍼는 버스 종점이다. 구멍가게라 불러도 될 만큼 작은 가게지만 시외버스표를 직접 발행한다.
“시내버스표는 2년 전부터 안 팔아. 이것도 언제까지 할지 모르겠네.”

20년 전에 충남 천안시 동남구 동면으로 시집와 차부상점을 인수했다는 아주머니는 ‘차부슈퍼약’이라고 간판을 내걸었다. 조그만 마을이라 약방이 없어 간단한 상비약을 비치했다. 슈퍼의 모습은 20년 전과 똑같다. 달라진 건 버스표에 인쇄된 요금 숫자와 버스 시간표뿐인데, 사람들로 북적이던 차부상회 풍경은 온데간데없다.

 

 

 

충북 영동군 학산면 정류장슈퍼

 

 

 

“예전에는 굉장했어. 사람들이 바글댔지.”

 

 

간판도 달지 않은 판교차부상회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한 노인이 잘나가던 시절 동네 자랑을 했다. 충남 서천군 판교면 가곡리는 작은 마을이지만 한때는 극장이 있을 정도로 번성했다. 우시장이 사라지고 기차역이 이전하자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다. 번화가였던 상점가에 드문드문 빈 가게들이 보인다. 문전성시를 이루던 오일장도 한나절이면 파한다.

 

 

군청에서 멀지 않은 마을이지만 판교면을 지나는 버스에는 교통카드 단말기가 없다. 마을 밖으로 나가려면 버스표를 사러 차부상회에 가야 한다. 비가 내리자 마을 사람들이 차부상회 처마 밑에 모였다. 우산을 접고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 차부상회는 마을 사랑방이 됐다.

 

 

 

충남 서천군 판교차부상회

 

 

 

차가 오면 금방 떠날 사람들이지만 차부상회는 늘 미닫이문을 열어둔다.

어둠이 내리면 차부상회는 불을 켜고 외지로 나갔던 사람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오늘도, 막차가 들어올 때까지 차부상회 간판 불빛이 깜박거리고 있을 것이다.

 

 

 

 

충남 천안시 동남구 천안차부슈퍼

 

충청도 차부상회 201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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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창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