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빗 핀처’ 감독 영화 <밀레니엄> 스틸컷. 포토그래픽 메모리 능력을 갖고 있는 살란데르. 2011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는 기록이 있다(요한복음). 기록(문자) 이전에 말이 먼저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말 이전에는 아무 것도 없었을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자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세기 1장 천지창조의 시작이다. 요한복음에는 태초에 말씀이 계셨지만,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적혀있다. 신약 요한복음 보다 앞선 구약 창세기에는 말씀인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니 빛이 ‘있었고’라고 기록됐다. 천지 창조의 시작은 ‘빛’이었다. 하나님은 이 빛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한다. 즉, 세계에 대한 인식은 빛을 ‘보는’ 것에서 시작됐다.

창조과학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문자보다는 말이, 그리고 말 보다는 ‘보는 행위’가 세상을 인식하는 첫 관문이라는 것을 성경이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주기에 인용했다. 사람들은 말을 배우기 전에 사물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 아직 ‘엄마’라고 말하지 못하는 아기들도 옹알거리며 제 부모를 알아본다. 기억은 말에 선행하며, 보는 행위와 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진 기억력’ 혹은 ‘포토그래픽 메모리’라 불리는 기억 능력이 있다. 과거의 일들을 사진 꺼내 ‘보듯이’ 구체적으로 기억해내는 능력이다. 과학적으로 증명되지는 않았다. 하긴, 과학은 ‘본다는 행위’를 증명할 수는 없다. 카메라의 원리는 과학적이지만 카메라가 찍은 사진을 의미 있게 바라본다는 것은 과학의 범주를 벗어난다. ‘본다는 것’은 언어 이전, 혹은 언어 너머의 의미 작용을 탐색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과학은 언제나 언어나 숫자, 혹은 기호를 수단으로 증명할 수밖에 없다. 과학이 사진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과학은 단지 증명된 결과에 대한 증거로 사진을 제시한다. 세계적인 과학 잡지에서는 사진을 증거로 제시하지 못할 경우 그래픽의 도움을 빌리기도 한다. 이런, 과학이 그림의 힘을 빌리다니….

증거로서의 사진, 사진의 많은 특성 중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무기다. 과학뿐만 아니라 증거 사진은 권력의 도구로 활용되기도 한다. 이명박 정부 때부터 부쩍 늘어난 경찰의 채증 요원들! 사복 차림의 요원들은 사진기자 흉내를 내며 DSLR 카메라를 들고 집회 현장에서 과격분자들의 모습을 찍어낸다. 부정할 수 없는 증거 능력 때문이다. 검찰 수사에도 도움이 된다. 다음은 ‘포토그래픽 메모리’로 검색된 최순실씨의 조카 장시호씨에 대한 중앙일보의 기사에서 발췌했다.

특검팀 관계자는 “언론의 과거 보도처럼 ‘주도면밀한 최순실의 참모’는 전혀 아니었지만 문서와 사건을 사진 찍듯 기억하는 ‘포토그래픽 메모리’가 상당히 뛰어났다”며 “장씨의 구체적인 기억 때문에 수사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장시호 “의왕대학원에서도 특검팀 생각에...” 2017. 3. 22.

 

 

 

‘데이빗 핀처’ 감독 영화 <밀레니엄> 스틸컷. 살란데르. 2011.

 

 

포토그

래픽 메모리가 사건 수사에 도움을 주는 소설이 있다. 스웨덴 기자 출신 작가 ‘스티그 라르손’의 소설 <밀레니엄>이다. 작가처럼 주인공의 직업은 ‘미카엘’이라는 이름의 심층보도 전문기자다. 미카엘은 광고주인 대기업의 비리도 여과없이 폭로하며 진실을 향한 강직한 의지를 굽히지 않는 기자다. 하지만, 강인한 기자 정신만으로는 사건을 파헤치기는 역부족이다. 미카엘에게 구원투수가 나타난다. 흘끗 흘려 봐도 사회 문제아로 보이는 ‘살란데르’라는 이름의 젊은 여성이다. 코와 눈썹에는 피어싱은 물론 몸 구석구석에 문신이 새겨져 있다. 동성애도 즐긴다. 하지만 그녀의 기억력은 특별나다. 살란데르의 두 눈은 마치 카메라의 렌즈처럼 사진을 찍으며 일반인들이 쉽게 흘려버릴 만한 장면들을 떠올린다.

반사회적이지만 천재적인 두뇌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그 천재적인 뇌는 범인들이 따라갈 수 없는 논리력과 암기력을 발휘한다. 다만 그런 뇌를 갖고 있는 것과 사회성은 별개의 문제다. ‘존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이라는 미국의 천재 수학자가 있었다. 그는 어렸을 적, ‘찰스 디킨스’의 3부작 장편소설 ‘두 도시 이야기’를 30분 동안 암송해 주위 사람들의 혀를 내두르게 했다.

그가 만든 이론은 다양하다. 프로그램 내장 방식이라는 컴퓨터 구조식은 ‘폰 노이만 구조’라 불리는데, 복잡성만 증가했지 지금 사용하는 모든 컴퓨터 구조는 바로 이 수학자가 발명한 것이라 한다. 컴퓨터를 잘 모르니 다른 예를 든다. 게임이론 중 ‘상호확증파괴(Mutual Assured Destruction)’ 전략이 있다. 핵 무장을 한 적대적인 두 나라가 핵미사일 버튼을 누를 수 없는 힘의 관계를 설명한다. 만약 한 나라가 미사일 버튼을 누르는 순간, 상대국도 핵미사일을 발사하기 때문에 서로 자멸하는 상황이 도래한다. 예측 가능한 자멸의 길을 막기 위해 핵미사일 버튼을 누를 수 없다. 즉, 핵 무장은 핵무기를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용하지 않기 위해 개발하는 것이다. 요즘 한국의 핵 무장을 요구하는 보수 야당의 주장과 맥을 같이한다.

소설 <밀레니엄>의 사회 문제아 살란데르처럼 존 폰 노이만도 두뇌만 천재였지, 사회성은 부족했다. 음담패설을 즐겼고, 비서의 치마 속을 보는 것이 취미였다. 낭비벽도 있어 고급 시계에 환장했고 자가용도 매년 갈아치웠다. 언어나 숫자, 그리고 기호의 논리를 따라가는 그의 두뇌는 다른 과학자들도 부러워할 정도로 천재적이었지만, 사회성은 젬병이었다.

 

 

 

 

존 폰 노이만. 구글 이미지.

 

 

 

사진 찍듯이 사소한 것들을 구체적으로 기억하는 포토그래픽 메모리 능력은 어떻게 가능할까? 기억은 어떤 장면을 말로 서술하거나, 글로 적거나, 다시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재현된다. 말과 글, 그림은 모두 해석의 과정이자 하나 이상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살란데르의 어깨에는 용문신이 있다’는 장면은 펑크족 스타일의 살란데르의 모습을 ‘혐오스럽다’고 해석했기 때문에 그녀의 모습을 쉽게 기억하는 것이다. 이런 해석의 과정이 없다면 기억의 힘도 떨어진다.

보통 사람들도 포토그래픽 메모리 능력이 아예 없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 사진들이 무의식의 암실에 갇혀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을 뿐이다. 범죄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최면 요법을 받아 자기가 자각하지도 못했던 장면을 기억해낸다. 굳이 최면사가 꼭 있어야 될 필요도 없다. 어떤 단초들이 암실에 갇혀있던 사진들에게 빛을 보게 한다.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는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홍차에 적신 마들렌 하나로 유년의 기억을 되찾는다.

“어머니는 사람을 시켜 생자크라는 조가비 모양의, 가느다란 홈이 팬 틀에 넣어 만든 ‘프티트 마들렌’이라는 짧고 통통한 과자를 사 오게 하셨다. 침울했던 하루와 서글픈 내일에 대한 전망으로 마음이 울적해진 나는 마들렌 조각이 녹아든 홍차 한 숟가락을 기계적으로 입술에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내 몸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감미로운 기쁨이 나를 사로잡으며 고립시켰다.”

홍차 한 숟가락의 미각과 후각이 프루스트 몸속에서 특별한 화학작용을 일으켰다. 잃어버린 시간들이 소환됐다. 포토그래픽 메모리를 갖고 있는 사람은 아마도 호주머니 속에 여러 개의 마들렌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필요할 때마다 꺼내 먹으면 무엇이든 기억해낼 수 있는 마법의 마들렌. 이러한 기억의 소환을 ‘프루스트 효과’ 혹은 ‘마들렌 효과’라고 부르기도 한다. 말이나 글은 소환된 기억을 다시 기록하는 수단일 뿐이다.

2017.9.

Posted by 김창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