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공책] 가려진 세계의 징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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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호의 꿈

김창길 2012. 10. 3. 18:42

 

 

칠흑같이 검은 밤바다는 오징어배의 불빛으로 유월의 꽃밭처럼 현란했다. 사내들이 만선의 깃발을 꽂고 항구에 돌아오면 아낙들은 밤새 생선의 배를 갈랐다. 아비로부터 용돈을 받은 아이들은 오징어 다리를 씹으며 구멍가게로 향했고, 사내들은 밤새 술을 마셨다. 동네 개가 돈을 물고 다닌다는 소문에 타지인도 뱃일을 하러 이곳 산동네에 판잣집을 틀었다. 화려했던 시절, 강원도 동해시 묵호동의 옛 모습이다.

 

 

“고기가 있어야지. 버티다 버티다 2년 전에 고깃배 세 척 다 팔아버렸지.”

40여년 묵호 앞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해온 이선문씨는 옛 묵호동의 모습을 회상했다. 동네 아낙들은 사내들이 잡아온 물고기를 지고 언덕 비탈길을 올랐다. 장화를 신고 다니는 논길과 비슷한 진흙탕 고샅길이기에 논골길이라 불렀다. 아낙들은 생선을 앞마당에 널며 남자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비 오는 날이면 새끼줄이 썩을까봐 물고기를 널지 않았다. 좀 많다 싶게 잡은 날은 한 두 마리씩 이웃집 앞에 놓고 가기도 했다.

 

 

묵호 앞바다에서 물고기가 사라지자 사람들도 떠났다. 명태는 씨가 말랐고, 오징어도 기름값 생각하면 배를 띄우기 머뭇거릴 정도로 어획량이 감소했다. 묵호 빌딩이라 불릴 정도로 화려했던 산동네는 빈집이 늘어 적막감이 돌았다. 묵호동 산동네에는 이제 옛 시절만 추억하는 노인들만 남았다.

 

 

“쓸쓸했는데,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좋아.”

세 달 전에 남편을 떠나보냈다는 한 할머니가 논골길 담장 벽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2010년 을씨년스러웠던 묵호동 산동네는 재밌는 그림이 이어지는 벽화마을로 옷을 갈아입었다. 단지 예쁜 그림만이 아니라 마을 주민들의 삶을 그려 넣었다. 명태덕장, 오징어덕장, 생선이 담긴 ‘고무다라’를 머리에 이고 오르는 아낙들의 모습, 옛 논골상회에 걸렸던 영화 <미워도 다시 한번> 포스터…. 마을 노인들은 벽화를 보며 옛 시절을 추억하고, 외지인들은 묵호동의 옛 모습을 상상한다.

 

동이 트기 전 묵호동 산동네가 내려다보이는 덕장 언덕에 올랐다. 유월의 꽃밭처럼 화려하다던 묵호 앞바다는 쓸쓸했다. 1963년 첫 불을 밝혔던 묵호 등대만이 검은 바다 묵호를 비추고 있었다.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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