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디 셔먼 인스타그램

 

 

 

 

환갑이 넘은 원조 셀피 사진작가의 인스타그램 계정이 최근 공개됐다. 1970년대에 등장해 세계 미술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셀프 포트레이트 여성 사진작가 ‘신디 셔먼(Cindy Sherman, 1954-)’의 인스타그램이다. 자화상 사진을 그녀가 처음 찍었던 것은 아니다. 공식적으로 카메라의 발명이 선언됐던 1839년에 ‘로버트 코닐리어스(Robert Cornelius)’라는 사진가가 이미 자신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하지만 사진 자화상이라는 표현 형식에 대한 가능성을 의미 있게 각인시킨 사람은 미국 여성 아티스트 신디 셔먼이었다. 그녀의 자화상 2컷은 1981년에 390만 달러에, 1985년에는 270만 달러에 팔리기도 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사진 10위 안에 2장을 밀어 넣은 비싼 사진작가가 노년에 접어들며 인스타그램에 손을 뻗친 것이다.

신디 셔먼의 인스타그램 자화상은 다른 셀피 사진들처럼 예쁘고 귀엽고 깜찍하지 않다. 그녀의 많은 나이 때문이 아니다. 그녀는 변장술의 대가다. 신디 셔먼의 탁월한 메이크업 솜씨와 패션 감각은 60이 넘는 나이를 쉽게 속일만큼 기똥차다. 하지만 신디 셔먼은 비슷한 나이의 한국 여성 대통령처럼 팽팽한 피부를 위해 보톡스나 필러에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녀의 선택은 반대였다. 변신술은 자기 모습을 망가뜨리기 위해 사용됐다. 하지만 그런 흉측하면서도 기괴한 그녀의 얼굴 사진에 13만이 넘는 인스타그래머들은 환호했다.

젊었을 적 신디 셔먼의 모습은 어땠을까?

 

 

신디 셔먼, 무제 #153, 1985
https://www.artsy.net/artwork/cindy-sherman-untitled-number-153

 

 

 

강가에 한 젊은 여성의 사체가 누워 있다. 1985년에 발표된 셀프 포트레이트 무제(#153) 사진이다. 제목이 없기에 이끼 가득한 검은 흙밭에 누워있는 이 여성을 사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핏기 없는 얼굴, 초점 잃은 눈빛, 입가와 이마, 볼에 뭍은 흙과 더럽혀진 옷들을 관찰하는 눈은 신디 셔먼을 사체로 판단하게 만든다. 오른 쪽 뺨에 보이는, 시간이 좀 지난 듯한 피멍 자국은 죽음의 원인을 타살로 몰아간다. 당시 방영된 미국 드라마 ‘트윈 픽스(Twin Peaks, David Lynch 감독)’를 본 사람이라면 신디 셔먼의 얼굴을 보며 살해당한 주인공 ‘로라’의 모습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무제#153 사진뿐만 아니라 신디 셔먼의 다른 사진들 대부분은 대중 매체가 쏟아내는 여성 이미지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신디 셔먼은 자기가 대중 매체들의 이미지를 미리 염두에 두지 않고 사진을 만들었다고 말했지만, 사람들은 대중 매체의 상투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본다. 대중 매체로(TV, 영화, 광고, 인터넷 등) 둘러싸인 일상을 사는 현대인들이 이미지를 떠올리는 방식은 이런 상투적인 이미지에 기댈 수밖에 없다. 마땅히 견줄만한 실재도 없다. 생생한 체험을 표현할 때 ‘마치 한 편의 영화 같았어’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적당해 보이는 것처럼. 이런 의미에서 프랑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현대인은 원본 없는 파생실재의(시뮬라크르simulacre) 세계 속에 갇혀 있다고 말한다. 스튜디오라는 가상 공간에서 촬영된 신디 셔먼의 시체놀이 사진은 15년 후 270만 달러에(약 30억) 팔렸다.

시체놀이 사진이 이토록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다시 물어본다면,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젊은 여성의 사체 사진을 그토록 비싼 돈을 주고 구입했을까? 질문에 답이 있다. 제 정신이 아니기 때문에 이 사진을 살 수 있었다. 사체에서 풍기는 마력은 제 정신으로는, 이성의 영역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이미지이다. 사체 앞에서 혼란스러운 살아있는 자들은 죽은 자의 얼굴을 가리기위해 안간힘을 쏟는다. 눈 뜨고 죽은 사체는 눈꺼풀을 닫아 주고, 흰 천이나 거적으로 사체의 얼굴을 덮는다. 사체의 얼굴은 두렵다. 공포감을 발산하는 사체의 얼굴은 장의사에 의해 화장되거나 살아있을 적의 얼굴 사진이 대신해 조문객들을 맞는다.


죽은 사람의 얼굴은, 프랑스 비평가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의 표현에 따르면(‘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에서), 산 자들을 ‘홀리는 힘’을 갖고 있다. 장례 의식은 죽은 사체의 접근을 제한하는 ‘금기’를 설정하고, 산 자들을 다시 일상의 세계로 복귀시키는 의례 장치다. 어느 누가 제 정신이 아니고서는 장례식장을 찾아 고인의 진짜 얼굴을 보려 한단 말인가? 신디 셔먼은 이런 홀리는 힘을 갖고 있는 사체의 얼굴에 대한 금기를 건드렸다. 눈 뜨고 죽은 한 젊은 여성이 강가에 누워 당신을 홀리고 있다. 조명에 반사된 신디 셔먼의 눈동자는 이 홀림의 힘을 증폭시켜준다. 아직 그녀의 몸에는 빠져나가지 못한 혼이 남아 있는 듯한, 식어가는 생명의 느낌도 묻어있다. 조르주 바타유는 금기에 대한 위반에서 예술이 탄생했고, 바로 이 넘어섬에 대한 욕망이 최초의 인간과 동물을 구별 짓는 인간 조건이라고 말한다.

 

 

 

신디 셔먼, 무제 #96, 1981 https://www.artsy.net/artwork/cindy-sherman-untitled-number-96
지난 2012년에 370만 달러에 거래됐던 신디 셔먼의 사진. 창백한 사체를 표현한 차가운 느낌의 무제#153과는 여러 모로 대조적이다. 빨간 매니큐어를 칠하고 붉게 달아오르는 소녀의 얼굴과 시선은 미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금기를 위반하려는 신디 셔먼의 욕망은 그녀가 작품 활동을 시작한 1970년대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진다. 초기 흑백사진 무제필름스틸(Untitiled Film Still) 시리즈도 일종의 위반에서 출발한다. 카메라가 포착해야할 진실은 뒷전으로 미루고 연출 사진을 만들었다. 대중 매체가 쏟아내는 가상의, 상투적인 이미지를 재사용한다. 마치 할리우드 영화의 스틸컷처럼. 실재가 아닌 허구의 이미지에 탐닉하는 그녀의 시선은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회적 금기를 넘어선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도색잡지 모델, 걸인, 마약 중독자, 시체 등 광인의 범주에(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인물군) 속하는 사람들을 신디 셔먼은 연기한다.

신디 셔먼은 사진 내용뿐만 아니라 사진을 찍는 형식도 전복시켰다. 그녀는 자기 고백적인 셀프 포트레이트라는 형식을 취하면서 고해성사는커녕 역할 놀이를 펼쳤다. 그리고 카메라 뒤에 숨은 다른 사진작가들과 다르게, 렌즈 앞에 도발적인 작가의 모습을 드러냈다. 카메라 뒤에 숨은 작가는 하늘 위에 숨어 목격되지 않는 신과 같은 존재다. 작품은, 피사체는, 피조물은 이런 일방적인, 그리고 관음증을 유발시키는 시선의 세계에서 갇혀 있다. 피조물은 신의 뜻에 따라 탄생했고, 작품은 작가의 의도에 따라 해석돼야 했다. 신디 셔먼은 이런 시선의 위계구도를 전복했다. 해석의 다양성을 열었다. 그녀에게 카메라는 다른 사진작가들이 믿고 있듯이 진실을 포착하는 기계장치가 아니다. 다양한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수단일 뿐이다. 때문에 그녀는 사진작가라는 타이틀보다는 아티스트라고 불리기를 원한다.

사진을 하나의 표현 수단으로 생각하기에 신디 셔먼의 인스타그램 사진은 조작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인다. 아이들이 색칠공부 놀이를 하듯이 그녀의 얼굴에 낙서를 한다. 망측하지만, 거부감 없이 바라볼 정도의 기괴한 얼굴들이다. 다른 셀피들과 다른 이유는 여기에 있다. 신디 셔먼은 카메라 뒤에 숨은 시선, 그리고 자기 사진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문제 삼고 있다. 누구를 위해서 예쁘고 깜찍해 보이려는가? 인스타그램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팔로워라 불리는 익명의 사용자들이다. 하지만 사고의 기능은 스마트폰 카메라 앞에서 멈춘다. 스마트폰 카메라에 연결된 가상공간을 떠도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관음의 대상이 되길 원한다. ‘좋아요’, ‘공감’ 횟수가 늘어날수록 만족감은 커져 간다. 나를 봐주세요! 나를 눌러주세요! 나를 공유해주세요!

 

 

 

신디 셔먼 인스타그램

 

 

“나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도록, 내 이미지의 모든 부분에서 힌트를 얻기를 바랍니다.” - The Guardian 2016. 7. 3.

신디 셔먼이 인스타그램에 자화상을 올린 이유나 의도는 알 수 없다. 그녀 자신이 인스타그램에 대해 아직 이렇다 할 이야기를 내놓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자기 사진을 보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자기 자신을 돌아볼 것을 주문한다. 그녀는 다만, 자신의 그로테스크한 얼굴들을 셀피 중독자들에게 투척할 뿐이다.

 

2017.9.

Posted by 김창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