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공책] 가려진 세계의 징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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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김창길 2013. 6. 16. 16:26

 

서울 남산에서 바라본 서쪽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2008년.

 

때이른 더위에, 때이른 장마가 찾아 온다.

큰 맘 먹고 부모님에게 에어컨을 설치해드렸다.

바람만 나오면 된다며 싼 거 보내라던 부모님이 디자인이 예쁘다며 박수를 친다.

내가 생각해도 좀 과한 에어컨이다.

복잡한 작동법은 내가 봐도 모르겠다.

요즘 에어컨 리모컨 버튼이 너무 많다.

 

 

서울역. 2012년.

 

부모님 집에 에어컨이 도착한 날, 우리집 에어컨에 전원 버튼을 눌렀다.

작동이 되지 않는다.

실외기가 먹통이다.

 

지난 겨울, 까치 한 쌍이 나뭇가지들을 부지런히 에어컨 실외기 쪽으로 나르더니 둥지를 틀었다.

까치를 보며 좋은 소식을 가져다줄거라며 아내와 기뻐했다.

그런데 좋은 소식은 커녕,

녀석들이 실외기 보금자리를 마련한 이후로 에어컨은 파업을 선언했다.

 

 

서울시청. 2013년 6월 16일. 

 

동이 트면 시작되는 까치 울음 소리가 이제 시끄럽다.

닭도 아니면서 날이 밝으면 매일 '까악, 까악' 지저귄다.

부하가 치민다.

달걀도 못 주는 것들이 실외기나 망가트리고...

도끼날 눈빛으로 비둘기 부부를 노려보는데, 우리 공주님이 한마디 한다.

 

"까치 달걀 낳았어?"

 

눈을 고쳐 뜨고 공주님에게 대답한다.

 

"날씨가 너무 덥나봐. 아직 없네. 아빠가 마트에서 사온 달걀로 후라이 해줄께"

 

까치들아, 조심해라.

내 어린 딸과 아내가 집에 없는 날,

너희들을 어떻게 할지 나도 장담할 수 없다.

 

 

서울 종로.

 

2013. 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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