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김창길의 사진공책 (8)
[사진공책] 가려진 세계의 징후들
하얀 고깔모자를 쓴 광대 노인이 카트를 밀며 걷고 있다. 네덜란드의 한 마트 옥상 주차장이다. 모든 광대가 그렇듯이 노인의 표정도 슬프다. 웃기 싫은데 웃을 수밖에 없는 광대 조커의 슬픈 표정과는 다르다. 그의 슬픔도 이유가 있다. 노인네답게 한 발 늦었다. 사재기로 마트는 이미 텅 비어 있던 것이다. "코비드-19 펜데믹이 발생한 후 첫 주 동안 저는 전혀 알 수 없는 미지의 것에 대한 전례 없는 두려움으로 말 그대로 거의 마비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공포에 질린 모든 사람들은 벽 뒤에 숨었다. 우편물조차 배달되지 않았던 상황. 하지만 사진작가 어윈 올라프는 이 공포를 사진 찍기로 결심했다. 그의 나이는 감염 고위험군에 속하는 61세. 게다가 그는 만성폐쇄성폐질환 환자다. 네덜란드 사진작가가 찍은 코로..
코로나 바이러스는 전세계로 퍼져나가고 전세계적으로 사랑받던 코로나 맥주는 생산이 중단됐다. 바이러스와 이름이 같아 소비자들이 등을 돌려 그랬을 것이란 추측이 무성했다. 공장이 멈춘 이유는 아주 달랐다.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내려진 비필수 업종 영업 중단 명령 때문이었다. 맥시코를 대표하는 코로나 맥주의 정식 이름은 코로나 엑스트라. 깔끔하고 이국적인 디자인과 독특한 음용법 때문에 미국에서 제일 잘 팔리는 수입 맥주다. 암갈색이 아닌 투명한 맥주병은 시원한 느낌이다. 복고풍의 알파벳 텍스투라체(Textura)로 쓰인 'Corona Extra' 상표와 왕관 마크는 이국적이다. (바이러스 이름 문제 때문에 많이 알려졌는데, 코로나는 라틴어로 왕관이란 뜻이다.) 미국인들이 바닷가에서 곧잘 마신다는 코로나..
스키 보조 다리를 단 오토바이를 탄 검은 개(Animal farm, Solovki, White Sea, Russia 1992), 보드카와 빵을 담은 가방을 물고 집으로 가는 개(Solovki, mer Blanche, Russia, 1992), 해변에 앉아 있는 덩치 큰 개를 향해 화를 내고 있는 갈매기(Western Cape, South Africa 2002), 생선 덕장을 바라보고 있는 열 마리의 길고양이들(Iceland (Cats looking up at hanging fish), 1980)... 사진작가의 행운은 어디에서 찾아올까? 수면 위에 얼굴만 내민 개구리, 누운 소 위에 누워 자는 개, 염소를 올라탄 원숭이, 짝 짓기 하는 두 쌍의 개, 사람처럼 상체를 곧추 세워 보조석에 앉아있는 푸들, 신..
20세기를 목전에 둔 1900년 12월, 세계를 뒤흔들 러시아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은 적국 독일에서 신문을 창간했다. 제호는 "이스크라(Iskra)". 우리말로는 불꽃, 불똥, 섬광. 신문 이스크라의 좌우명은 이렇다. "하나의 불꽃이 큰 불로 타오를 것이다!" From a spark a fire will fare up! 노동자와 농민이 주축이 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RSDLP) 결성을 위해 고민했던 레닌은 동명의 공산당 조직론을 1902년에 집필했다. 이스크라 제4호에 발표한 에 제기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이기도 했다. 이미 이스크라 창간을 통해 실행에 옮긴 레닌은 프롤레타리아의 조직화를 위한 전 러시아적 정치신문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공산주의 운동이라는 큰 불을 지피기 위한 쏘시개가 신문 이스크라였던 ..
겨울에 피는 동백꽃 여인이 아니었다. 길을 잃은 여자도.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먹고 유년의 세계로 돌아간 마르셀 프루스트가 만단 배우 사라 베르나르는 금지된 욕망에 사로잡힌 여인 ‘페드르’이었다. 극작가 ‘장 라신’이 쓴 비극의 제목이자 주인공인 ‘페드르’는 남편과 전처의 아들 사이에서 괴로워하다 독약을 삼킨다. 프루스트의 아버지는 유년의 그에게 페드르를 연기한 사라 베르나르에 대한 신문기사를 소개해준다. " 공연은 예술계와 비평계 대표 인사들이 자리한 가운데 열광하는 관객들 앞에서 이루어졌으며, 페드르 역을 연기한 마담 베르마(사라 베르나르)에게는 그녀의 명예로운 경력에서도 보기 드문 찬란한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마르셀 프루스트, , 민음사. 101쪽) 소설 에서 반복 등장하는 베르나르는 고대 그리..
51년 전 12월 24일, 지구인은 우주인이 보내온 아름다운 선물을 받는다. 칠흑같이 어두운 우주에서 떠오르는 파란 행성의 모습. 나사 이미지 AS08-14-2383로 등록된 지구를 찍은 사진은 '지구돋이(Earthrise)'이란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나사의 두 번째 유인 우주선 아폴로8호는 우주 항해 나흘 만에 달의 궤도에 진입했다. 크리스마스이브 오후 4시. 세 명의 우주인은 달 표면 위로 떠오르는 아름다운 지구의 모습을 목격했다. 윌리엄 앤더스 (달착륙선 조종사) : 맙소사! 저기 저 그림을 봐! 지구가 떠오르고 있어. 와우, 예쁘네. 프랭크 보먼 (아폴로 8호 선장) : 이봐, 사진 찍지마. 그건 계획에 없던 일이야. (농담) 앤더스 : 컬러 필름 있어, 짐? 칼라 롤필름 좀 내게 줘 바. 짐 ..
추운 겨울에도 꽃봉오리를 피워 사랑 받는 동백(冬柏). 새빨갛게 달아올라 움츠렸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동백. 시들기도 전에 '툭'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져 마음 놀래게 하는 동백. 한국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동백(공효진 분)이는 8살 아들 필구를 홀로 키우는 술집 주인이지만, 프랑스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의 '동백꽃 여인(La Dame aux Camelias, 1848)'의 주인공 '마르그리트 고티에'는 코르티잔(courtesan, 귀족 혹은 부자들의 정부)이었다. 작가 뒤마 피스가 사랑했던 실존 인물이었고 이름은 '마리 뒤플레시'. 폐병으로 22살에 요절했다. 이탈리아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는 동백꽃 여인을 오페라로 각색했다. 길을 잃은 타락한 여인이라는 뜻의 '라 트라비아타(La Trav..
홍콩에서 총성이 울렸다. 지난 11일 범죄인 인도법안에 반대하는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방아쇠를 당겼다. 중국 국경절인 10월 1일에도 시위 참가자를 향한 전투경찰의 조준 사격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은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과격 행동에 대한 경찰의 대응이었던 반면 최근에 벌어진 경찰의 실탄 발사는 맨손의 시위 참가자를 향한 사격이었다는 점에서 홍콩 시위자들의 공분을 샀다. 시위 참가자를 향해 조준 사격하는 경찰의 모습이 담긴 동영상을 보며 나는 50여 년 전 베트남에서 울렸던 총성의 울림을 시각 이미지로 반추하게 했다. 총을 쏘는 자와 쓰러지는 자의 구도는 항상 동일하기 때문이다. 1968년 구정 대공세(Tet Offensive) 이틀째 날인 2월 1일, 베트남 사이공 찔런 대로에서 총성이 울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