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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녀석, 모비딕

김창길 2020. 7. 14. 22:25

/ Augustus Burnham Shute

 

거대한 녀석 '모비딕(Moby Dick)'을 찾아 떠나는 항해 일지는 방대하다. 칠레 모카 섬에 출몰하던 난폭한 향유고래를 낸터컷의 고래잡이들은 '모카딕'이라 불렀다. 포경 선원이었던 미국 작가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1819-1891)은 모카딕의 공격으로 침몰한 포경선 '에식스'호의 생존기를 소설로 각색했다. 작가 김석희가 번역한 허먼 멜빌의 <모비딕>(작가정신)600페이지가 넘는다. 첫 문장은 간결하다.

 

"Call me Ishmael."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

 

영국 작가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와 더불어 가장 잘 쓴 첫 문장이라 손꼽힌다. 번역가는 첫 작업이 어려웠을 것이다. 옮긴이의 덧붙임 글에는 이러한 고민에 대한 사연이 적혀 있다. "-이라고 해두자"라는 것은 굳이 꼭 그의 이름이 '이슈마엘'이 아니어도 상관은 없다는 것이다. 어차피 이야기는 바다의 폭군 '모비딕'과 고래를 쫓는 '에이해브' 선장과 포경선 '피쿼드' 고래잡이들의 이야기다. 이슈메일은 구경꾼이다.

 

허먼 멜빌 Herman Melville / U.S. Library of Congress

 

옮긴이는 포경선, 선장, 선원의 이름에 대한 사연도 풀어놨다. 일등항해사인 '스타벅'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 것은 다행이다. 누군가는 미국 커피 회사 '스타벅스' 이름이 커피를 좋아하는 소설 <모비딕>'스타벅'에서 유래했다고 말한다. 커피를 마시는 일등항해사 스타벅의 이야기는 소설에 없다. 다만 창업자가 소설 <모비딕>을 좋아했던 것은 사실이다. 원래는 포경선의 이름 '피쿼드(peaquod)'를 회사 이름으로 점찍었다. 하지만 오줌(pea)과 감옥(quod)이 연상된다는 컨설턴트의 만류로 포기한다. 'st'로 시작하는 이름이 좋다는 조언에 창업자는 고지도에 표시된 시애틀의 광산 '스타보'를 보았고, 소설의 일등항해사 '스타벅'을 떠올린 것이다. 엄밀히 따져보면 커피와 모비딕의 직접적인 연관관계는 없는 것이다.

 

피쿼드는 미국 인디언 부족의 이름이다. 코네티컷 강 유역에 살고 있던 피쿼드족은 백인 침략자들과 치열하게 싸웠으나 1637년에 전멸했다. 백인들은 여자와 아이들까지 몰살했다. 피쿼드라는 이름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남아 있는 것이다.

피쿼드호 선장은 폭군이다. 이름 '에이해브'는 구약 성서 <열왕기>에 나오는 유대인 왕 '아합'의 영문 표기다. 아합 역시 강력한 군주였다.

 

선원이었던 '이슈마엘' 역시 유대인 '이스마엘'의 영문식 표기다. 유대인 시조 '아브라함'의 서자. 아브라함의 부인 '사갈'은 아이를 갖지 못했다. 몸종 '하갈'이 대신 낳은 아들의 이름이 '이스마엘'이다. 하지만 뒤늦게 사라가 아들 '이삭'을 낳자, 몸종 하갈과 장자이자 서자인 이스마엘은 팔레스타인 땅으로 추방됐다. <모비딕>의 이슈마엘은 땅에서 추방당한 서자인 것이다.

 

 

에이해브 Ahab, 1902 / I. W. Taber

거대한(moby) 녀석(dick) 모비딕은 한국어로 '백경(白鯨)'이라 번역되기도 했다. 모비딕의 색깔이 하얀색이라 점이 부각된다. 더 멀리 생각을 이어가자면 하얀색의 향유고래는 포악한 백인 제국주의자를 떠올려 볼 수도 있다. 모비딕은 북아메리카 원주민 피쿼드족을 섬멸시켰던 백인 침략자처럼 피쿼드호를 침몰시킨다. 지은이 허먼 멜빌은 이 하얀색의 속성에 대해 곱씹어본다.

 

"하지만 감미로운 것, 명예로운 것, 숭고한 것과 관련된 것들을 이렇게 모두 모아보아도 이 흰색의 가장 깊숙한 개념 속에는 좀처럼 포착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숨어 있어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붉은 핏빛보다 더 많은 공포를 우리 영혼에 불러일으킨다." (허먼 멜빌, <모비딕> 42장 고래의 흰색, (작가정신), 248)

 

언뜻 순수해 보이는 하얀색은 내부의 포악함을 숨기고 있을 때가 있다. 하얀 북극곰은 어떤 맹수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만큼 사납다. 백호(白虎)와 백사(白蛇)도 마찬가지. 시뻘겋게 타오르는 불꽃은 끝내 모든 것을 집어 삼키고 하얀 재 가루만을 세상에 남겨 놓는다. 하얀색은 공포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착각 때문에 더 많은 공포를 우리 영혼에 불러일으킨다.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계의 다양한 측면은 사랑 속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은 두려움 속에서 이루어졌다." (같은 책, 255)

 

눈에 보이지 않은 영역은 스멀스멀 하얀색으로 나타난다. 마치 유령처럼. 일등항해사 스타벅은 보이지 않는 두려움을 경계한다.

 

"고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내 보트에 절대로 태우지 않겠다고 스타벅은 말했다. 이 말은 가장 믿을 수 있고 쓸모 있는 용기는 위험에 맞닥뜨렸을 때 그 위험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데에서 나온다든 뜻일 뿐만 아니라,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은 겁쟁이보다 훨씬 위험한 동료라는 뜻이기도 했다." (같은 책, 160)

 

202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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