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공책] 가려진 세계의 징후들
수암골 연탄 마을 본문
이웃집 앞에 놓인 연탄재에 그림을 그리고 말풍선을 달았다. “간밤엔 따뜻하셨죠?” 아침에 눈을 뜬 이웃집 아줌마는 연탄재를 차마 버릴 수 없었다. 머리 위에 상추를 키우는 연탄들이 달을 바라보고 있다.
한여름을 목전에 둔 6월에도 마을 고샅길 귀퉁이에 연탄재가 쌓인 달동네가 있다. 누런 연탄재에는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의 웃는 얼굴이 담겨 있다. 연탄을 실은 리어카, 오줌 싸는 사내아이, 샤워하는 여인 등 재밌는 벽화가 그려진 충북 청주시 달동네 수암골이다.
수암골은 한국전쟁 당시 1·4후퇴로 피란온 가난한 사람들의 터전이었다. 육군병원에서 빌린 천막에서 생활하던 피란민들이 우암산 기슭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40년 가까이 수암골에서 구멍가게를 지키고 있는 박만영 할아버지(80)가 옛날 수암골의 모습을 들려준다.
“판잣집은 무슨. 흙으로 벽돌을 한 장 한 장 찍어내고 볏짚으로 하늘을 가렸지.”
황량한 불모지에 흙벽돌로 희망을 쌓아올린 피란민들은 이제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자식들 대부분을 도시로 출가시킨 노인들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목욕하는 여인을 무등을 탄 연탄들이 훔쳐보고 있다. 평상에 누워 있는 할아버지는 어디를 보고 계실까?
청주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제법 큰 골목길 담장에 지역 예술가들이 타일을 붙이고 있었다. 마을 벽화체험교실에 참여한 방문객들이 그린 조그만 타일 그림이다. 골목길 벽화작업은 2008년부터 시작됐는데, 골목길 정취가 드라마틱해 유명 연예인이 출연하는 드라마가 수암골에서 촬영되기도 했다.
동네를 구경하던 여자 아이가 오줌 싸는 사내아이를 보고 등을 돌렸다.
“커다란 가게들만 잔뜩 생겨 동네가 사라질까봐 걱정돼.”
마을 작업장에서 짚으로 멍석을 만들던 할아버지가 한숨을 내쉰다. 방송을 통해 수암골이 유명세를 타자 드라마 제목을 가게 이름으로 내건 커다란 음식점들이 마을 주변에 들어섰다. 골목길을 돌며 찰칵찰칵 사진을 찍던 탐방객들은 동네 입구 구멍가게를 지나쳐 전망 좋은 카페에 들어가 지갑을 연다. 수암번영회를 만들어 빼앗길 뻔한 골목길은 지켜냈지만 우후죽순으로 들어서는 상업시설은 속수무책이다.
“소통 없이 돈만 벌고 있는 게 문제죠.”
수암골 마을공동체 마실 이광진 사무국장(56)은 수암골을 사람들이 살아가는 동네로 바라봐주기를 바란다. 당연한 얘기건만, 당연하지 않은 게 문제다. 수암골이라는 마을 이름까지 상표로 등록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기 때문이다.
가족 탐방객이 수암골 벽화지도를 보며 동네를 구경하고 있다. 간밤 부부의 악다구니 싸움 사연과 쌔근쌔근 잠자는 아기의 숨소리, 새벽녘 귀가하는 터벅터벅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골목길이다.
고샅길 담벼락에 안도현 시인의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마라'가 적혀 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 었느냐
자신의 몸뚱아리를
다 태우며 뜨끈뜨끈한
아랫목을 만들던
저연탄재를
누가 함부로 발로 찰수 있는가?
자신의 목숨을 다 버리고
이제 하얀 껍데기만 남아 있는
저 연탄재를
누가 함부로 발길질 할 수있는가?
탐방객이 그린 타일을 예술가들이 동네 담벼락에 붙이고 있다.
수암골은 외지인들에게 따뜻한 추억을 선사하며 연탄재가 되고 있다.
수암골을 함부로 차지 마라.
하얀 껍데기만 남은 수암골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40여년 가까이 마을 사람들의 주전부리를 해결해준 삼충상회 앞에서 동네 주민들이 인사하고 있다.
2014. 6. 8 - 10. 청주 수암골
P.S. 지금 수암골에서는 비주류 독립작가 RM의 <거리에 남긴 연탄들>이 열리고 있다. 거리 전시회다.
(간밤에 따뜻하셨죠?http://photonote.khan.kr/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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