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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공책] 가려진 세계의 징후들
가난한 뱃사람들이 유달산 너른 품에 안겼다. 마을 뒷산에 오른 아낙들은 먼 바다로 나간 남편과 조금새끼들을 위해 기도한다. 붓꽃 빛깔로 노을이 떨어지는 바다는 아낙들의 기도 소리를 싫고 먼 바다로 나아간다. 목포는 항구다. 1896년 개항으로 만들어진 도시가 목포다. 항구가 생기자 목포 앞바다에서는 해상시장인 파시가 사시사철 열렸고, 돈 냄새를 맡은 가난한 뱃사람들이 모였다. 몸뚱이 말고 가진 것 없는 그들은 바다가 굽어보이는 유달산 남쪽 자락에 보금자리를 틀었는데, 따뜻했다. ‘아따, 따숩은 기미네’ 다순구미 마을. 따뜻하다는 의미의 전라도말 ‘따숩다(다순)’와 후미진 곳을 일컫는 ‘기미(구미)’를 일컫는 다순구미는 행정구역 이름으로 온금동이다. 따뜻할 온자와 비단 금자를 쓴다. 정식 명칭이야 나랏일 ..
이웃집 앞에 놓인 연탄재에 그림을 그리고 말풍선을 달았다. “간밤엔 따뜻하셨죠?” 아침에 눈을 뜬 이웃집 아줌마는 연탄재를 차마 버릴 수 없었다. 머리 위에 상추를 키우는 연탄들이 달을 바라보고 있다. 한여름을 목전에 둔 6월에도 마을 고샅길 귀퉁이에 연탄재가 쌓인 달동네가 있다. 누런 연탄재에는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의 웃는 얼굴이 담겨 있다. 연탄을 실은 리어카, 오줌 싸는 사내아이, 샤워하는 여인 등 재밌는 벽화가 그려진 충북 청주시 달동네 수암골이다. 수암골은 한국전쟁 당시 1·4후퇴로 피란온 가난한 사람들의 터전이었다. 육군병원에서 빌린 천막에서 생활하던 피란민들이 우암산 기슭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40년 가까이 수암골에서 구멍가게를 지키고 있는 박만영 할아버지(80)가 옛날 수암골의 모습을 들..
거리에 남긴 연탄들 / 청주 / NO 39, 40. 충북 청주의 달동네 수암골에서 거리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지난 5월 15일부터 시작된 ‘연탄, 예술이 되다’ 프로젝트는 무기한으로 진행된다. 스스로를 비주류 독립작가로 규정한 비정규 문화예술 노동자 RM은 자본주의적 문화예술시스템을 거부한다. RM은 보다 진보적인 문화예술행동을 지향하는 독립예술가가 되기 위해 발버둥치는 가난뱅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거리에 남긴 연탄들 / 청주 / NO 26. 2012년 봄이었다.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그림을 그리던 RM은 이웃집 대문 앞에 놓여 있는 연탄재를 발견하고 낙서를 한다. “간밤에 따뜻하셨죠?"라고. 거리에 남긴 연탄들 / 청주 / NO 12 신기하게도 그 연탄재는 며칠이 지나도 버려지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슬레이트 지붕이라도 좋다. 지금 이대로 살 수 있다면. 떡 하나, 작은 음료수 한 병도 나누던 동네 인심이 재개발을 버텨냈다. 특별한 이름도 없이 그냥 달동네라 불리던 대전 대동 산1번지에 봄이 왔다. 대동 달동네는 한국전쟁 피란민들이 모여 살던 판자촌이었다. 배나무가 많아 배골산이라 불리던 계족산 남쪽 줄기에 가난한 사람들이 보금자리를 틀었다. 산비탈을 깎아 작은 평지를 만들고 천막과 판자를 둘러 비바람을 막았다. 살림살이가 조금 나아지자 비가 새던 판자 지붕을 아스팔트 기름으로 바르거나 슬레이트로 바꿨다. 아스팔트 찌꺼기로 코팅한 루핑 지붕은 없어졌지만 대동 달동네는 아직도 슬레이트 지붕이 비와 눈을 막아주고 있다. “아파트가 들어서면 뭐해. 관리비도 못 낼 텐데. 죽을 때까지 이대로 살았으면 좋겠어..
낮 동안 퍼부었던 폭우가 그치고 물만골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도심 빌딩 불빛보다 화려하지 못하지만 황령산을 은은히 밝히는 물만골의 불빛이 따뜻하다. 부산 황령산 계곡에 자리한 동네다. 예로부터 물이 많이 나는 계곡이라 해서 이런 정겨운 이름이 붙었다. 물만골은 격동의 현대사를 지켜보며 이 땅의 숱한 민초들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 한국전쟁 때는 전국에서 몰려든 피란민들을 보듬었고, 급격한 산업화 동안에는 뿌리 뽑힌 농촌이주민들의 고향이 됐다. 부산에 큰 아파트들이 들어서면서 쫓겨난 철거민들도 물만골의 너른 품으로 찾아들었다. 물만골의 맑은 물은 외롭고 힘든 서민들의 눈물을 기꺼이 씻어줬고, 타는 목을 축이게 했다. 내일을 살아갈 힘을 보탰다. 물만골 사람들이 폭우에 유실된 하천 축대를 쌓고 있다. 주민..
처음엔 '인디언촌'이라 불렀다. 한국전쟁 이후 갈 곳 없는 사람들이 인왕산 아래 천막을 세웠다. 옛 사진을 볼 수 없지만, 천막촌의 모습이 인디언 마을과 비슷했단다. 인디언처럼 소리지르고 다니는 사람도 많았다는데, 이유는 알 수 없다. 서울에 몇 남지 않은 달동네 서대문구 홍제3동 주택가 마을이다. 인디언촌. 천막주거지라는 인상 때문인지 마을 사람들은 지난 1983년 마을 이름을 개명했다. 열심히 살아가는 '개미마을'로. 개미마을에는 200여가구 400여명의 주민들이 개미처럼 살고 있다. 이름을 바꾼 개미마을은 지난 2009년 새로운 옷을 갈아입었다. 관할 구청과 한 건설사가 40여년 버텨온 주택에 벽화를 그려넣었다. '빛 그린 어울림 마을'이라는 주제로 이틀동안 그렸다고한다. 개미마을 벽화를 둘러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