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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공책] 가려진 세계의 징후들
영화 한편이 시골 마을을 아트빌리지로 탈바꿈시켰다. 탈북한 새터민 여성이 팝아티스트로 성장해나가는 이야기를 담은 박진순 감독 영화 '설지'다. 북한에서 선전화를 그렸던 주인공 설지는 탈북한 후 오토바이 헬멧을 쓰고 벽화를 그렸다. 누리꾼에게 이목을 끈 설지는 '홍대 벽화녀'라는 별명이 붙었고, 다큐멘터리 감독과 함께 제주에 내려간다. 설지의 제주 배경이 된 곳이 신천리다. 반어 반농의 시골 마을 신천리는 서귀포시 성산읍의 조용한 마을이었다. 영화의 소재인 벽화를 그리기 위해 팝아티스트 등 예술인들도 마을에 상주하며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현재 51점의 벽화가 신천리 곳곳에 숨어있다. '마을 벽화 주제가 뭔지 아세요?' '몰라요.' '무제' 신천리 해안가에서 카페를 하는 주인 말처럼 벽에 그려진 그림들은..
이웃집 앞에 놓인 연탄재에 그림을 그리고 말풍선을 달았다. “간밤엔 따뜻하셨죠?” 아침에 눈을 뜬 이웃집 아줌마는 연탄재를 차마 버릴 수 없었다. 머리 위에 상추를 키우는 연탄들이 달을 바라보고 있다. 한여름을 목전에 둔 6월에도 마을 고샅길 귀퉁이에 연탄재가 쌓인 달동네가 있다. 누런 연탄재에는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의 웃는 얼굴이 담겨 있다. 연탄을 실은 리어카, 오줌 싸는 사내아이, 샤워하는 여인 등 재밌는 벽화가 그려진 충북 청주시 달동네 수암골이다. 수암골은 한국전쟁 당시 1·4후퇴로 피란온 가난한 사람들의 터전이었다. 육군병원에서 빌린 천막에서 생활하던 피란민들이 우암산 기슭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40년 가까이 수암골에서 구멍가게를 지키고 있는 박만영 할아버지(80)가 옛날 수암골의 모습을 들..
슬레이트 지붕이라도 좋다. 지금 이대로 살 수 있다면. 떡 하나, 작은 음료수 한 병도 나누던 동네 인심이 재개발을 버텨냈다. 특별한 이름도 없이 그냥 달동네라 불리던 대전 대동 산1번지에 봄이 왔다. 대동 달동네는 한국전쟁 피란민들이 모여 살던 판자촌이었다. 배나무가 많아 배골산이라 불리던 계족산 남쪽 줄기에 가난한 사람들이 보금자리를 틀었다. 산비탈을 깎아 작은 평지를 만들고 천막과 판자를 둘러 비바람을 막았다. 살림살이가 조금 나아지자 비가 새던 판자 지붕을 아스팔트 기름으로 바르거나 슬레이트로 바꿨다. 아스팔트 찌꺼기로 코팅한 루핑 지붕은 없어졌지만 대동 달동네는 아직도 슬레이트 지붕이 비와 눈을 막아주고 있다. “아파트가 들어서면 뭐해. 관리비도 못 낼 텐데. 죽을 때까지 이대로 살았으면 좋겠어..
처음엔 '인디언촌'이라 불렀다. 한국전쟁 이후 갈 곳 없는 사람들이 인왕산 아래 천막을 세웠다. 옛 사진을 볼 수 없지만, 천막촌의 모습이 인디언 마을과 비슷했단다. 인디언처럼 소리지르고 다니는 사람도 많았다는데, 이유는 알 수 없다. 서울에 몇 남지 않은 달동네 서대문구 홍제3동 주택가 마을이다. 인디언촌. 천막주거지라는 인상 때문인지 마을 사람들은 지난 1983년 마을 이름을 개명했다. 열심히 살아가는 '개미마을'로. 개미마을에는 200여가구 400여명의 주민들이 개미처럼 살고 있다. 이름을 바꾼 개미마을은 지난 2009년 새로운 옷을 갈아입었다. 관할 구청과 한 건설사가 40여년 버텨온 주택에 벽화를 그려넣었다. '빛 그린 어울림 마을'이라는 주제로 이틀동안 그렸다고한다. 개미마을 벽화를 둘러봤다...
낙산 성곽길을 한 시민이 걷고 있다. 낙산 정상에서는 북악산과 북한산 능선을 감상할 수 있다. 사진에 보이는 제일 높은 봉우리는 북한산 보현봉이다. 눈이 오면 낙산에 간다. 정확히 말하면 눈이 온 다음 날 낙산에 간다. 눈이 오는 당일에는 시계가 혼탁해 먼 풍경을 담을 수 없다. 눈이 오는 당일에는 많은 눈이 쏟아지는 장면과 교통체증으로 포인트를 맞춘다. 교통체증이 없는 정도의 반가운 눈이라면 눈 내리는 낭만적인 서울의 모습을 담고, 많은 눈으로 교통에 문제가 생기면 오르막길에서 고생하는 차량 운전자들을 찾아다닌다. 눈이 온 다음 날은 대부분 시계가 좋은 맑은 날씨가 이어진다. 반가운 눈 혹은 폭설로 인한 교통체증 다음 날 사진뉴스는 대부분 골목 빙판 출근길이나 아름다운 설경에 포인트를 맞춘다. 두 가지..
칠흑같이 검은 밤바다는 오징어배의 불빛으로 유월의 꽃밭처럼 현란했다. 사내들이 만선의 깃발을 꽂고 항구에 돌아오면 아낙들은 밤새 생선의 배를 갈랐다. 아비로부터 용돈을 받은 아이들은 오징어 다리를 씹으며 구멍가게로 향했고, 사내들은 밤새 술을 마셨다. 동네 개가 돈을 물고 다닌다는 소문에 타지인도 뱃일을 하러 이곳 산동네에 판잣집을 틀었다. 화려했던 시절, 강원도 동해시 묵호동의 옛 모습이다. “고기가 있어야지. 버티다 버티다 2년 전에 고깃배 세 척 다 팔아버렸지.” 40여년 묵호 앞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해온 이선문씨는 옛 묵호동의 모습을 회상했다. 동네 아낙들은 사내들이 잡아온 물고기를 지고 언덕 비탈길을 올랐다. 장화를 신고 다니는 논길과 비슷한 진흙탕 고샅길이기에 논골길이라 불렀다. 아낙들은 생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