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공책] 가려진 세계의 징후들
검게 타들어간 허파의 꽈리 (양키시장 vol.1. - 인천 송현동) 본문
츄잉껌, 씨레이션, 시바스, 코냑, 말보로, 바셀린로션, 아스피린, 간스메(통조림), 초콜릿, 비스킷, 레브론 샴푸, 콜게이트 치약, 곰보 모양의 케이스에 담긴 곰보스킨….
구리무(크림)가 왔다며 북을 ‘둥둥’ 치고 다니던 화장품 장사꾼은 리필용 동동구리무 대신 미제 크림과 스킨을 팔았다. 향이 좋은 스킨 올드스파이스를 향수로 뿌리고 다닐 정도로 양키들의 물건은 냄새부터 달랐다. 미국은 멀리 있지 않았다. 따뜻하게 입고, 달콤하게 먹고, 촉촉하게 바르고, 유혹하는 냄새가 나는 물건들이 바로 미국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삶의 밑천이 없던 이북 피란민들이 미군부대 주변에서 장사를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됐다. 미군과 동거하던 양색시와 부대를 출입할 수 있던 한국 군무원들이 풀어놓은 물건들이 거래됐다. 잿밥에만 관심 있던 미군들이 직접 풀어놓은 물건들도 있었다. 전쟁 용품이라기에는 너무나 다양한 물건들이 거래되는 풍경이 시끌벅적해서 ‘도떼기시장’이라 불렀다. 헌병, 세관원 등의 단속반이 뜨면 감쪽같이 사라진다 해서 ‘도깨비시장’이라고도 했다. 더러 국제시장이라 부르기도 했지만, 일제보다는 미제가 많아 ‘양키시장’이라고 불렀다. 전쟁이 중단된 지 70여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동두천 생연동 애신시장, 인천 송현동 중앙시장, 군산 대명동 재래시장, 대구 교동시장은 원주민들에게는 지금도 양키시장이라 불리고 있다.
나의 할아버지처럼 뱃길 따라 내려온 이북 피난민들이 많았을 것이다. 황해의 갯골을 따라가다 보니 소나무가 많다던 인천 동구 송림동, 송현동의 야트막한 야산을 만났다. 일제시대 일본인이 서울 노량진과 인천을 잇는 수도관을 개설하고 배수지를 만든 곳이라 수도국산이라고도 불렀다. 피난민은 수도국산에 판자로 찬바람을 막고 쉴 곳을 만들었다. 만수동의 괭이부리말처럼 수도국산은 가난한 이들을 품에 안고 마을을 형성했다.
판자촌 야산 아래의 공터는 화재 확산 방지를 위한 소개공지였다. 삶의 밑천을 고향에 두고 나온 피난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공터에서 장사를 했다. 소개공지에는 좁은 뱃길이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배다리'라는 이름의 시장이 있었다.
동인천역 북광장 동편에 양키시장이 있다. 정식 명칭은 인천송현자유시장이다. 주식회사 중앙상사로 지난 1965년에 재개장했다. 양키시장 입구의 옷가게 라인 상사 주인장의 기억에 따르면 지금의 꼴을 갖춘 것은 1970년대 중후반이다. 3층짜리 건물들로 군집된 상가들이다. 현존하는 제일 오래된 극장인 애관극장이 제2관으로 운영하던 오성극장이 있었던 건물 군이다.
지금의 동인천 양키시장을 이세기 시인은 "환한 어둠이 살고 있는" 장소라고 사진작가 김보섭의 사진집에 썼다. 시장은 죽음을 앞둔 폐병 환자의 허파를 떠올리게 한다. 조각난 슬레이트 지붕에서 새어나오는 빛줄기들이 비추는 공간은 허파의 꽈리마냥 아직 숨을 쉬고 있다. 하지만 셔터가 내려진 대부분의 상가들은 어둠에 묻혀 있다. 닫혀버린 꽈리들. 낮고 엉성한 지붕에서는 오수가 뚝뚝 떨어지고 있다.
이곳이 서울의 명동처럼 휘황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간판도 있다. 양복점 백만불라사는 통금시간 직전까지 셔터를 내리지 않고 돈을 끌어 모았던 시절도 있었다는 것일 게다. 간판들은 또 다른 이야기들도 전해준다. 황해사, 평양 수선집 주인들은 피란민이었다고. 영례네, 경자네, 석이네, 은정이네, 재규네…. 좁은 골목 낮은 하늘 아래 팻말처럼 걸린 작은 간판들의 이름은 이모네, 형제사, 자매집처럼 시장 상인 모두가 가족같이 지냈다는 뜻일 게다.
동인천 양키시장의 숨통은 곧 끊어질 것이다. 노쇠하고 경쟁력 없는 공간은 재개발의 논리가 잘 먹히는 장소다. 곧 무너질 것같은 천장과 낡은 벽채는 이곳이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아님을 알려준다. 그래도 아직 숨을 쉬고 있는데 이곳을 떠날 수야 있겠는가? 50여 년 동안 양키시장을 지켰던 옷가게 호남사의 늙은 주인은 이곳이 헐릴 그날까지 가게 문을 열겠다고 했다.
(양키시장 다음 사진공책에 계속 : 대구 교동, 동두천 생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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