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공책] 가려진 세계의 징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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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길의 사진공책

늙은 광대의 일기

김창길 2020. 9. 1. 17:03

April Fool_ 2020_9.45am ⓒErwin Olaf, Coutesy of K.O.N.G Gallery

 

 하얀 고깔모자를 쓴 광대 노인이 카트를 밀며 걷고 있다. 네덜란드의 한 마트 옥상 주차장이다. 모든 광대가 그렇듯이 노인의 표정도 슬프다. 웃기 싫은데 웃을 수밖에 없는 광대 조커의 슬픈 표정과는 다르다. 그의 슬픔도 이유가 있다. 노인네답게 한 발 늦었다. 사재기로 마트는 이미 텅 비어 있던 것이다.

 

"코비드-19 펜데믹이 발생한 후 첫 주 동안 저는 전혀 알 수 없는 미지의 것에 대한 전례 없는 두려움으로 말 그대로 거의 마비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공포에 질린 모든 사람들은 벽 뒤에 숨었다. 우편물조차 배달되지 않았던 상황. 하지만 사진작가 어윈 올라프는 이 공포를 사진 찍기로 결심했다. 그의 나이는 감염 고위험군에 속하는 61세. 게다가 그는 만성폐쇄성폐질환 환자다.

 

 

Erwin Olaf / Courtesy of K.O.N.G Gallery

 

 

 네덜란드 사진작가가 찍은 코로나19의 공포는 펜데믹이라는 말처럼 전세계적이다. 한국인 관객도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찍은 공포는 우리에게 실재적이지는 않다. 우리는 유럽과 달리 사재기를 하지 않았다. 다만, 우리는 그러한 상황을 영화나 외신 뉴스를 통해 경험했다. 어쩌면 영화 같은 공포가 더 무서울 지도 모른다.

 

 사진기자인 내가 겪은 코로나19의 공포도 그러했다. 사진 파일 날짜는 지난 3월 18일이다. 인천국제공항의 전광판이 먹통이 된 것처럼 표시되는 비행기 운항 정보가 거의 없었다. 세계 각국이 하늘 길을 봉쇄하고 있었다. 휑한 공항에 있던 소수의 사람들은 자국으로 돌아가려는 방역복을 입은 중국인들과 로봇 청소기. 내 머릿속에는 핵전쟁 후의, 혹은 좀비의 습격으로 마비된 도시의 모습을 찍은 영화들이 떠올랐다.

 

 어윈 올라프가 떠올린 것은 하얀 고깔모자와 광대 마스크였다. 밀랍처럼 굳어진 마스크의 광대 노인은 무표정한 표정을 짓고 있다. 중세 시대에 죄수나 사형수가 썼다는 '카피로테(capirote)'를 떠올리게 하는 하얀 고깔모자는 우스꽝스럽다가 결국에는 섬뜩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백인우월주의 KKK단은 이 섬뜩함을 알아차렸고, 그들의 복장으로 택했다.) 하지만 두려움과 섬뜩함, 공포를 느낀 것은 광대를 연기했던 어윈 올라프 그 자신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것을 그대로 드러내기보다는 두 번 감추는 방법을 선택했다. 하얀 밀랍을 얼굴에 바르고, 무표정을 연기하는 것. 감출 수 없는 것을 두 번 감추려 했기 때문에 광대의 절망감과 두려움은 배가 된다.

 

 늙은 광대의 페르소나는 결국 발각된다. 옷차림만큼 단정한 그의 몸 동작도 감출 수가 없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매일 같은 메뉴의 아침 식사를 하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지만 자신에게는 중요한 사소한 일들을 시간에 맞추어 해나가는 그런 성실함이 배어 있는 몸짓들이다. 그래서 결국 어윈 올라프라는 광대는 조커처럼 위협적이지 않다. 지금은 절망하고 있는 늙은 광대는 공원 벤치에 앉아 잠시 쉬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일상으로 복귀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은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며 만우절에나 일어날 법한 일들이기 때문이다.

 

 

어윈 올라프, <2020년 만우절>, 공근혜 갤러리, Sep 2 - 30,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