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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공책] 가려진 세계의 징후들
하얀 고깔모자를 쓴 광대 노인이 카트를 밀며 걷고 있다. 네덜란드의 한 마트 옥상 주차장이다. 모든 광대가 그렇듯이 노인의 표정도 슬프다. 웃기 싫은데 웃을 수밖에 없는 광대 조커의 슬픈 표정과는 다르다. 그의 슬픔도 이유가 있다. 노인네답게 한 발 늦었다. 사재기로 마트는 이미 텅 비어 있던 것이다. "코비드-19 펜데믹이 발생한 후 첫 주 동안 저는 전혀 알 수 없는 미지의 것에 대한 전례 없는 두려움으로 말 그대로 거의 마비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공포에 질린 모든 사람들은 벽 뒤에 숨었다. 우편물조차 배달되지 않았던 상황. 하지만 사진작가 어윈 올라프는 이 공포를 사진 찍기로 결심했다. 그의 나이는 감염 고위험군에 속하는 61세. 게다가 그는 만성폐쇄성폐질환 환자다. 네덜란드 사진작가가 찍은 코로..
거대한 녀석 '모비딕(Moby Dick)'을 찾아 떠나는 항해 일지는 방대하다. 칠레 모카 섬에 출몰하던 난폭한 향유고래를 낸터컷의 고래잡이들은 '모카딕'이라 불렀다. 포경 선원이었던 미국 작가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1819-1891)은 모카딕의 공격으로 침몰한 포경선 '에식스'호의 생존기를 소설로 각색했다. 작가 김석희가 번역한 허먼 멜빌의 (작가정신)은 600페이지가 넘는다. 첫 문장은 간결하다. "Call me Ishmael."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 영국 작가 찰스 디킨스의 와 더불어 가장 잘 쓴 첫 문장이라 손꼽힌다. 번역가는 첫 작업이 어려웠을 것이다. 옮긴이의 덧붙임 글에는 이러한 고민에 대한 사연이 적혀 있다. "-이라고 해두자"라는 것은 굳이 꼭 그의 이..
두 권의 책을 저울질 했다. 제러드 다아이몬드의 와 알베르 카뮈의 . 책의 두께와 무게는 가 시간의 두께는 가 두꺼웠다. 출퇴근용이었기에 가벼운 를 선택했다. 이방인 알베르 카뮈는 중세 유럽을 암흑에 몰아넣은 페스트 균을 전쟁 직후의 알제리의 한 해안도시 오랑에 퍼뜨리며 소설을 시작했다. "이 연대기의 주제가 되는 기이한 사건은 194X년 오랑에서 일어났다." 기이한 사건이란 도시에서 쥐가 무더기로 죽어나는 데서 시작한다. 그리고 고양이도 사라진다. 행정당국이나 기자도 이 징후들을 그냥 넘기지만 서술자는 이것을 어떤 불길한 징조로 차분히 관찰하고 기록한다. 모든 전염병의 징후들이 비슷한지는 모르겠으나 알베르 카뮈가 풀어나가는 194X년의 페스트는 21세기의 코로나19 전염병과 유사한 몇 가지 증상들을 보..
코로나 바이러스는 전세계로 퍼져나가고 전세계적으로 사랑받던 코로나 맥주는 생산이 중단됐다. 바이러스와 이름이 같아 소비자들이 등을 돌려 그랬을 것이란 추측이 무성했다. 공장이 멈춘 이유는 아주 달랐다.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내려진 비필수 업종 영업 중단 명령 때문이었다. 맥시코를 대표하는 코로나 맥주의 정식 이름은 코로나 엑스트라. 깔끔하고 이국적인 디자인과 독특한 음용법 때문에 미국에서 제일 잘 팔리는 수입 맥주다. 암갈색이 아닌 투명한 맥주병은 시원한 느낌이다. 복고풍의 알파벳 텍스투라체(Textura)로 쓰인 'Corona Extra' 상표와 왕관 마크는 이국적이다. (바이러스 이름 문제 때문에 많이 알려졌는데, 코로나는 라틴어로 왕관이란 뜻이다.) 미국인들이 바닷가에서 곧잘 마신다는 코로나..
눈보라기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서 헤어졌던 금순이를 목 놓아 찾던 이는 부산 국제시장 장사치다. 굳세어라 금순아! 전쟁 통에 헤어진 이산가족의 사연이 담긴 노래의 고향은 그러나 가사와는 달리 부산이 아닌 대구다. 1952년 여름 가수 현인, 오리엔트 레코드사 사장 이병주, 밀양 출신 작곡가 박시춘, 그리고 여수 출신 작사가 강사랑 네 사람은 대구 교동의 냉면집 강산면옥에서 식사를 마친 후 거리에서 노래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굳세어라 금순이가 태어난 곳은 부산 국제시장이 아닌 대구 교동 양키시장인 것이다. 교동 양키시장은 인천 송현동 양키시장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몸 하나 누일 공간 밖에 되지 않는 한 평도 못되는 작은 점방들이 벌집처럼 박혀 촘촘히 박혀있는 다닥다닥한 느낌이 비슷하다. 3층짜리 ..
스키 보조 다리를 단 오토바이를 탄 검은 개(Animal farm, Solovki, White Sea, Russia 1992), 보드카와 빵을 담은 가방을 물고 집으로 가는 개(Solovki, mer Blanche, Russia, 1992), 해변에 앉아 있는 덩치 큰 개를 향해 화를 내고 있는 갈매기(Western Cape, South Africa 2002), 생선 덕장을 바라보고 있는 열 마리의 길고양이들(Iceland (Cats looking up at hanging fish), 1980)... 사진작가의 행운은 어디에서 찾아올까? 수면 위에 얼굴만 내민 개구리, 누운 소 위에 누워 자는 개, 염소를 올라탄 원숭이, 짝 짓기 하는 두 쌍의 개, 사람처럼 상체를 곧추 세워 보조석에 앉아있는 푸들, 신..
츄잉껌, 씨레이션, 시바스, 코냑, 말보로, 바셀린로션, 아스피린, 간스메(통조림), 초콜릿, 비스킷, 레브론 샴푸, 콜게이트 치약, 곰보 모양의 케이스에 담긴 곰보스킨…. 구리무(크림)가 왔다며 북을 ‘둥둥’ 치고 다니던 화장품 장사꾼은 리필용 동동구리무 대신 미제 크림과 스킨을 팔았다. 향이 좋은 스킨 올드스파이스를 향수로 뿌리고 다닐 정도로 양키들의 물건은 냄새부터 달랐다. 미국은 멀리 있지 않았다. 따뜻하게 입고, 달콤하게 먹고, 촉촉하게 바르고, 유혹하는 냄새가 나는 물건들이 바로 미국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삶의 밑천이 없던 이북 피란민들이 미군부대 주변에서 장사를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됐다. 미군과 동거하던 양색시와 부대를 출입할 수 있던 한국 군무원들이 풀어놓은 물건들이 거래됐다...
20세기를 목전에 둔 1900년 12월, 세계를 뒤흔들 러시아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은 적국 독일에서 신문을 창간했다. 제호는 "이스크라(Iskra)". 우리말로는 불꽃, 불똥, 섬광. 신문 이스크라의 좌우명은 이렇다. "하나의 불꽃이 큰 불로 타오를 것이다!" From a spark a fire will fare up! 노동자와 농민이 주축이 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RSDLP) 결성을 위해 고민했던 레닌은 동명의 공산당 조직론을 1902년에 집필했다. 이스크라 제4호에 발표한 에 제기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이기도 했다. 이미 이스크라 창간을 통해 실행에 옮긴 레닌은 프롤레타리아의 조직화를 위한 전 러시아적 정치신문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공산주의 운동이라는 큰 불을 지피기 위한 쏘시개가 신문 이스크라였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