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공책] 가려진 세계의 징후들
동백꽃 필 무렵은 겨울 (상) 본문
추운 겨울에도 꽃봉오리를 피워 사랑 받는 동백(冬柏).
새빨갛게 달아올라 움츠렸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동백.
시들기도 전에 '툭'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져 마음 놀래게 하는 동백.
한국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동백(공효진 분)이는 8살 아들 필구를 홀로 키우는 술집 주인이지만, 프랑스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의 '동백꽃 여인(La Dame aux Camelias, 1848)'의 주인공 '마르그리트 고티에'는 코르티잔(courtesan, 귀족 혹은 부자들의 정부)이었다. 작가 뒤마 피스가 사랑했던 실존 인물이었고 이름은 '마리 뒤플레시'. 폐병으로 22살에 요절했다.
이탈리아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는 동백꽃 여인을 오페라로 각색했다. 길을 잃은 타락한 여인이라는 뜻의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 1853)'. 일본식 해석으로 한국에서는 '춘희(椿姬)'라고 말했다. 길을 잃은 타락한 여인의 이름은 '비올레타 발레리'다. 비올레타 역시 코르티잔이다.
동백꽃 여인 마르그리트 고티에를 연기했던 프랑스 배우 '사라 베르나르(Sarah Bernhardt, 1844-1923)'의 모친 역시 코르티잔이다. 19살의 베르나르가 국립국장 코메디 프랑세즈의 학생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친부의 재력 덕분이었다고 전해진다.
사라 베르나르는 프랑스의 좋은 시절이라 불리는 벨에포크(19세기말- 20세기초) 시대를 다룬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도 자주 등장한다. 소설 속 이름은 '라 베르마'. 코르티잔이었던 스완 부인의 딸 질베르트를 사랑했던 유년의 프루스트는 이 여배우의 사진을 상점에서 구입했다.
"돌아오는 길에 프랑수아즈는 루아얄 거리 모퉁이 노점상 진열대 앞에 나를 세우더니 자신의 새해 선물로 교황 비오9세와 라스파유 사진을 골랐고, 난 라 베르마의 사진을 샀다. 이 여배우가 불러일으킨 그토록 수많은 찬사에 답하기에 사진이 보여 주는 단 하나뿐인 얼굴은 어쩐지 초라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갈아입을 옷 없는 사람들의 옷처럼 한결같이 허술한 모습, 또 그녀가 과시할 수 있는 거라곤 윗입술 위 잔주름, 위로 올라간 눈썹, 그 밖의 몇몇 신체적 특징들로 화상이나 충격으로 생기는 늘 같은 것들이었다. 얼굴 자체만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이 견디어 냈을 모든 입맞춤 때문에, 또 이 '카드 앨범' 깊숙이에서 여전히 교태를 부리는 부드러운 눈길과 짐짓 천진난만한 미소로 여전히 호소하는 듯 보이는 입맞춤 때문에 그 얼굴은 키스하고 싶은 생각, 따라서 키스하고 싶은 욕망을 일으켰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 민음사. 112쪽.)
유년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나선 프루스트가 루아얄 거리 모퉁이에서 샀던 '라 베르마'의 사진은 누가 찍었을까?
벨에포크 시대의 걸출한 초상 전문 사진가가 있었다. 28살 때부터 자기 이름을 '나다르'라는 명명했던 사진가는 1861년 대문짝만하게 자기 이름이 적힌 간판이 걸린 사진 아틀리에의 문을 연다. 파리 카퓌신거리 35번지 2층인 이곳은 훗날 인상파 화가들의 첫 전시회가 열릴 정도로 보헤미안 성향의 예술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문인, 음악가도 아틀리에를 찾았다. 보들레르, 바그너, 로시니, 들라크루아, 도레, 모네, 밀레, 도미에……. 풍자만화가로서의 과거 경력은 인물의 개성을 뽑아내는 밑천이 됐다.
나다르가 남긴 사라 베르나르의 사진 세 장은 모두 1864년에 찍은 것으로 전해진다. 배우로서의 이렇다 할 경력도 없는 스무 살의 베르나르가 아빠가 없는 아들의 엄마가 된 해이기도 하다. 사진 속의 미혼모는 기둥에 기대어 먼 곳을 응시한다. 망토 위로 드러난 어깨선은 관능적이다. 팔을 숨긴 것은 가냘픈 모양새가 어린아이 같은 느낌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나다르와 같은 시대의 어떤 사람은 "우리의 사진 영웅은 알려지지 않은 먹잇감을 렌즈가 요리하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최대의 즐거움과 무한한 열정을 맛보았다"(한스 미하엘 쾨츨레, <포토아이콘>, 아트앤북스. 79쪽)고 쓰고 있다.
나다르는 '사진 영웅'이라할 만 했다. 열기구를 띄워 최초의 항공사진을 찍었고, 자연광이 없는 공간의 촬영을 가능하게 만든 전기 조명장치를 발명했다. 하지만 동시대의 어떤 사람이 그를 '영웅'이라 부른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던 것 같다. 나다르는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사진술이 있었지만 고집스레 자신만의 스타일로 인물 사진들을 완성해나갔다. 최초의 사진술이 발표된 지 15년 만인 1854년 파리의 또 다른 사진가 '디스데리'는 새로운 사진술에 대한 특허를 취득했다. 한번에 8장을 얻을 수 있는 명함판(Carte de visite) 사진이다.
명함판 사진은 시대의 요구에 맞춤했다. 비록 작지만 54mm * 89mm 크기의 사진 8장은 다른 사진술보다 저렴했다. 또 작기 때문에 방문 카드(visiting card or calling card : 내가 그곳을 방문했다고 이름을 적어 남기는 작은 메모)의 사교적 목적을 대체할 수 있었다. 상업적인 용도로 활용될 수도 있었다. 담배 값에 홍보를 목적으로 사진을 끼워 넣기도 했다. 제작 공정이 빠르고 간편한 명함판 사진술은 수지맞는 장사였던 셈이다. 하지만 나다르는 명함판 사진술을 외면했다. 인물사진의 완성도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타협하지 않고, 발터 벤야민이 말했던 사진 초창기에만 남아있다는 사진의 아우라를 뽑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프루스트가 상점에서 구입했던 사라 베르나르의 사진은 명함판 사진 이후에 유행했던 캐비닛 카드(cabinet card)였던 같다. 사이즈는 명함판 사진보다 2배 가량 컸다. 사진 완성도도 높았을 것이다. 캐비닛 카드는 말 그대로 진열장(캐비닛)에 진열하고 자랑했던 인물 사진이었기 때문이다. 받침대를 이용하기도 했고, 두꺼운 앨범에 꽂아 놓기도 했다. 프루스트는 그래서 사라 베르나르의 사진을 '카드 앨범'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었으리라. 그리고 그 사진이 "키스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 일으킬만한 했다면, 동시대의 어떤 사람이 "최대의 즐거움과 무한한 열정을 맛보았다"고 쓸 만한 나다르의 사진이지 않았을까?
(다음편 사진공책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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