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공책] 가려진 세계의 징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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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길의 사진공책

홍콩의 탱크맨은 어디 있을까?

김창길 2019. 11. 21. 19:04

YouTube ⓒ Cupid Producer

 

 홍콩에서 총성이 울렸다. 지난 11일 범죄인 인도법안에 반대하는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방아쇠를 당겼다. 중국 국경절인 101일에도 시위 참가자를 향한 전투경찰의 조준 사격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은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과격 행동에 대한 경찰의 대응이었던 반면 최근에 벌어진 경찰의 실탄 발사는 맨손의 시위 참가자를 향한 사격이었다는 점에서 홍콩 시위자들의 공분을 샀다. 시위 참가자를 향해 조준 사격하는 경찰의 모습이 담긴 동영상을 보며 나는 50여 년 전 베트남에서 울렸던 총성의 울림을 시각 이미지로 반추하게 했다. 총을 쏘는 자와 쓰러지는 자의 구도는 항상 동일하기 때문이다.

 

 1968년 구정 대공세(Tet Offensive) 이틀째 날인 21, 베트남 사이공 찔런 대로에서 총성이 울렸다. 남베트남 치안국장 로안(Nguyen Ngoc Loan)의 리볼버 38구경 권총에서 발사된 총알이 베트콩 포로의 오른쪽 머리를 관통하고 있다. (저작권이 있는 사진이기 때문에 이 글에 첨부하지 못하지만 '사이공 처형'이라는 키워드로 포털에 쉽게 검색된다.) 왼쪽 머리에 갖다 댄 권총의 총구는 격발의 반동으로 머리 위로 이격되고 있는 순간을 보여주고, 베트콩의 일그러진 얼굴 표정은 그 짧은 찰나의 순간에도 인간은 고통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한 장의 사진이 알려주고 있다. 한국전쟁은 물론 5.18광주항쟁을 기록했던 당시 AP기자였던 에디 아담스(Eddie Adams, 1933-2004)가 찍은 사진이다.

 

 "사이공에서 응우옌 응옥 로안 장군이 베트콩을 처형하다. General Nguyen Ngoc Loan execution a Viet Cong prisoner in Saigon."

 

 '사이공 처형'은 공개적인 즉결 처형이었다. 로안 장군은 주위에 있던 기자들의 존재를 알았다. 그곳에는 있었던 기자는 에디 아담스 이외에 NBC 카메라기자와 동아일보 고 김용택 기자였다. 장군은 구정 대공세를 퍼부은 야만적인 빨갱이의 최후를 본보기로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장군의 판단은 틀렸다. 죽음의 순간을 포착한 에디 아담스의 사진은 전쟁의 잔혹함을 고발하며 반전운동의 촉매제가 됐다. 퓰리처상과 월드 프레스 포토상을 받았고, 1972년 네이팜탄 폭격에 울부짖으며 도망치는 소녀의 사진을 찍은 닉 우트의 사진과 함께 베트남전을 기억하는 대표적인 사진으로 역사에 기록됐다.

 

 사이공이 함락된 1975년 로안 장군은 당시 형편이 좋았던 남베트남 시민들처럼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남들처럼 햄버거, 피자와 베트남 음식을 파는 작은 식당을 운영했다. 하지만 훗날 사이공 처형 사진의 당사자가 본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로안은 가게 문을 닫아야만 했다. 장군 로안의 이름 뒤에는 살인마 혹은 인간 도살자라는 꼬리표가 따라 다녔다. 초라한 미국 망명생활 끝에 로안이 암으로 사망하자 사진가는 그의 가족에게 사과했다.

 

 "장군은 베트콩을 죽였지만, 나는 내 카메라로 장군을 죽였다."

 

 훗날 에디 아담스는 미국은 로안 장군의 행동이 그럴 만 했다고 타임지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회고했다.  "만약 당신이 그 무더운 날 그 장소에 있던 (로안) 장군이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미국인 1, 2, 혹은 3명을 쏴 죽인 개자식을 잡았다면 말이다." 총을 맞고 얼굴이 일그러진 베트콩은 남베트남 장교와 그의 부인, 여섯 명의 자식들, 그리고 늙은 노모를 죽인 현행범이었다. "사진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이지만 사진은 절반 정도만의 진실일 뿐"이라는 것이 베테랑 종군기자의 고백이었다.

 

 민간인을 학살한 현행범에 대한 사이공식 즉결 처분으로 정당화 될 수 있을까? 당시 남베트남 법에 따르면 장군의 행동은 범죄였다. 어쨌든 심판 없는 포로의 사형은 살인과 다름없다. 그리고 에디 아담스의 측은지심과 달리 장군 로안에 대한 평가는 인색하다. 자신의 지프 차량에 이발사를 태우고 시내를 돌아다니며 장발 청년들의 머리를 밀어버렸고, 영장 없는 구금과 불교인들의 시위를 강경 진압하는 등 공권력을 멋대로 사용했던 과격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YouTube ⓒ Campus TV, HKUSU

 

 홍콩 시위대를 향해 실탄 세 발을 발사한 경찰에 대한 신상이 공개됐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일부 시위자들이 경찰관 딸의 신상을 공개하고 '우리 아빠는 살인자예요'라는 문구를 넣으며 살해위협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사이공 처형의 집행자였던 로안 대장의 사연을 떠오르는 것은 각자 입맛에 따라 한 사건의 이미지를 이용한다는 점이다.

 

     사이공식 처형을 저지른 남베트남 로안 장군 : 살인마라고 규정한 반전 운동세력 vs 애국자

     실탄 발사한 홍콩 경찰 : 살인자라고 규정한 홍콩의 일부 시위자들 vs 폭도를 향한 정당한 공무집행

     처형당한 베트콩 : 살인마라고 생각한 반공주의자들 vs 전쟁의 희생양

     실탄 맞은 홍콩 시위자 : 폭도로 규정한 중국 및 홍콩 정부 vs 폭력 진압의 희생양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사한 두 이미지가 기록된 과정이다. 50여 년 전 남베트남의 로안 장군은 기자들 앞에서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보여주었다. 반면 홍콩 경찰관의 행동은 우발적인 사건이었으며 피사체나 촬영자 모두 그 순간을 예상하지 못했다. 국내의 모든 일간지 1면을 장식했던 스틸 컷은 프로듀서 '큐피드(Cupid)'라는 이름이 각인된 동영상의 정지 화상이다. 예상해서 찍은 것이 아니라 찍히는 상황에서 예외적인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반면 로안 장군의 처형은 계획적이고 정치적인 행동이었다. , 그 장면을 바라보는 관객이 그의 행동을 정치적으로 평가할 자격이 주어진 셈이다. 하지만 이번 홍콩의 총격 장면을 보며 방아쇠를 당긴 경찰 개인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마녀사냥일 따름이다. 그리고 경찰의 이른바 신상 털기는 일부 과격한 시민의 일탈행동을 홍콩 언론이 의도적으로 과도 포장해 발행한 뉴스일 가능성도 농후하다. 중국 정부가 홍콩 민주화 시위대들을 폭도로 규정할 수 있는 예시가 되기 때문이다.

 

 홍콩 경찰의 총격 장면은 50여 년 전 남베트남에서 울렸던 총성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지만, 사태는 100여 년 전 발칸 반도에서 울려 퍼졌던 사라예보의 총성과 비슷한 형국으로 펼쳐졌다. 화약고였던 발칸반도의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저격 사건은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됐고, 홍콩의 잇단 총격 사건은 시위대가 투석기와 화염병, 그리고 불화살을 손에 들게 만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최후의 보루였던 홍콩 이공대학은 끝내 함락됐다. 실전이 아닌 이미지전이 필요했을 지도 모르겠다. 우산과 안대를 이용한 퍼포먼스 시위는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경찰의 최루탄을 우산으로 막았고, 고무탄은 안대로 응수했다. 나는 이번 홍콩의 민주화 시위에서 30년 전 중국 본토의 심장인 베이징 톈안먼에 홀연히 나타난 탱크맨이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육중한 쇳덩이로 만든 살육 기계를 막아선 또 다른 모습의 홍콩 탱크맨(http://h2.khan.co.kr/201805241001001). 톈안먼 항쟁은 실패했지만 30년 전에 찍힌 탱크맨 사진은 30년 전 중국 본토의 민주화 운동을 선명하게 상징하고 있다

 

2019.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