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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공책] 가려진 세계의 징후들
겨울에 피는 동백꽃 여인이 아니었다. 길을 잃은 여자도.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먹고 유년의 세계로 돌아간 마르셀 프루스트가 만단 배우 사라 베르나르는 금지된 욕망에 사로잡힌 여인 ‘페드르’이었다. 극작가 ‘장 라신’이 쓴 비극의 제목이자 주인공인 ‘페드르’는 남편과 전처의 아들 사이에서 괴로워하다 독약을 삼킨다. 프루스트의 아버지는 유년의 그에게 페드르를 연기한 사라 베르나르에 대한 신문기사를 소개해준다. " 공연은 예술계와 비평계 대표 인사들이 자리한 가운데 열광하는 관객들 앞에서 이루어졌으며, 페드르 역을 연기한 마담 베르마(사라 베르나르)에게는 그녀의 명예로운 경력에서도 보기 드문 찬란한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마르셀 프루스트, , 민음사. 101쪽) 소설 에서 반복 등장하는 베르나르는 고대 그리..
51년 전 12월 24일, 지구인은 우주인이 보내온 아름다운 선물을 받는다. 칠흑같이 어두운 우주에서 떠오르는 파란 행성의 모습. 나사 이미지 AS08-14-2383로 등록된 지구를 찍은 사진은 '지구돋이(Earthrise)'이란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나사의 두 번째 유인 우주선 아폴로8호는 우주 항해 나흘 만에 달의 궤도에 진입했다. 크리스마스이브 오후 4시. 세 명의 우주인은 달 표면 위로 떠오르는 아름다운 지구의 모습을 목격했다. 윌리엄 앤더스 (달착륙선 조종사) : 맙소사! 저기 저 그림을 봐! 지구가 떠오르고 있어. 와우, 예쁘네. 프랭크 보먼 (아폴로 8호 선장) : 이봐, 사진 찍지마. 그건 계획에 없던 일이야. (농담) 앤더스 : 컬러 필름 있어, 짐? 칼라 롤필름 좀 내게 줘 바. 짐 ..
추운 겨울에도 꽃봉오리를 피워 사랑 받는 동백(冬柏). 새빨갛게 달아올라 움츠렸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동백. 시들기도 전에 '툭'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져 마음 놀래게 하는 동백. 한국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동백(공효진 분)이는 8살 아들 필구를 홀로 키우는 술집 주인이지만, 프랑스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의 '동백꽃 여인(La Dame aux Camelias, 1848)'의 주인공 '마르그리트 고티에'는 코르티잔(courtesan, 귀족 혹은 부자들의 정부)이었다. 작가 뒤마 피스가 사랑했던 실존 인물이었고 이름은 '마리 뒤플레시'. 폐병으로 22살에 요절했다. 이탈리아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는 동백꽃 여인을 오페라로 각색했다. 길을 잃은 타락한 여인이라는 뜻의 '라 트라비아타(La Trav..
2019년의 마지막 달인 12월을 시작했던 1일 전국에 비가 내렸다. 기상청은 비가 그치면 북서쪽의 찬 공기가 몰려오면서 추워진다고 예보했고, 친절한 방송사 기상캐스터는 본격적인 겨울 추위가 시작될 것이라며, 핫팩 등 방한용품을 준비하라며 걱정이고. 겨울이지만 춥지 않다……. 그럼, 겨울이 아직 찾아오지 않은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자연의 이치가 인간이 정해놓은 날짜에 맞추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우리는 달력을 보며 왜 계절이 날짜에 맞추어 변하지 않을까 궁금해 한다. 이른바 날씨에 대한 감수성에 따라 형성된 기상학적 자아는 역사적인 산물이라는 것을 (책세상)을 쓴 알랭 코르뱅은 알려준다. “이제 비와 눈, 안개를 접하며, 또는 바람을 맞으며 개개인이 느꼈던 감정들이 남아있다. 이 모..
홍콩에서 총성이 울렸다. 지난 11일 범죄인 인도법안에 반대하는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방아쇠를 당겼다. 중국 국경절인 10월 1일에도 시위 참가자를 향한 전투경찰의 조준 사격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은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과격 행동에 대한 경찰의 대응이었던 반면 최근에 벌어진 경찰의 실탄 발사는 맨손의 시위 참가자를 향한 사격이었다는 점에서 홍콩 시위자들의 공분을 샀다. 시위 참가자를 향해 조준 사격하는 경찰의 모습이 담긴 동영상을 보며 나는 50여 년 전 베트남에서 울렸던 총성의 울림을 시각 이미지로 반추하게 했다. 총을 쏘는 자와 쓰러지는 자의 구도는 항상 동일하기 때문이다. 1968년 구정 대공세(Tet Offensive) 이틀째 날인 2월 1일, 베트남 사이공 찔런 대로에서 총성이 울렸다. ..
경향신문에서 사진 찍고, 글 쓰는 김창길입니다. 2017년부터 신문에 연재했던 [김창길의 사진공책]을 모으니 책 한권이 됐습니다. [사진공책, 가려진 세계의 징후들](들녘)이라는 책입니다. 사진찍는 기술 등에 대한 책은 아닙니다. '사진 읽기'에 대한 책입니다. 신문 연재로 소홀히 했던 블로그를 통해 [김창길의 사진공책]을 이어갑니다. cut@kyunghyang.com http://news.kyobobook.co.kr/common/copyContents.ink?sntn_id=15075 교보문고 북뉴스 해당 게시물에 대한 소스를 복사하여 원하는 곳(블로그, 카페 게시판 등)에 붙여넣을 수 있습니다. 글쓰기에서 HTML 편집상태로 전환하여 붙여넣기 하세요. 제목 [스크랩] 『사진공책, 가려진 세계의 징후들』..
겨울을 목전에 두고 가을 사진 세 장을 꺼냅니다. 가을이 겨울에 내려 앉았네 잿빛 겨울로 들어서는 길목에 색의 향연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만추(晩秋)의 삼원색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붉은빛과 주홍빛, 그리고 노란색이 제 몸 바스러지는 줄도 모르고 색을 태우고 있습니다. 성미 급한 겨울 바람이 만추의 삼원색을 시샘합니다. 색의 잔치를 빨리 끝내라며 나뭇가지를 흔들어댔습니다. 후드득 떨어지는 낙엽처럼 제 마음도 덜컹 내려앉았습니다. 아직 가을의 고운 빛깔들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래도 영원히 붙잡아 둘 수는 없겠죠? 영하의 바람을 감당할 수 없었던 은행 단풍 하나가 회색빛 코트 털뭉치 둥지에 내려앉았습니다. 가을은 그렇게 잿빛 겨울에 내려앉고 있었습니다. 2017. 11. 16. 정동 낙..
성요셉 아파트 2017. 1. 변두리야 그럴 수 있다 치지만 서울 한복판에 이런 오래된 동네가 있을 줄이야. 고층 빌딩 병풍에 둘러싸인 동네에는 새벽에 어시장도 열린다. 고층 아파트는 아니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주상복합 아파트도 있다. 서울 중구 중림동(中林洞) 마을이다. 중림동 도시환경 정비사업 구역. 2017. 1. 중림동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성당인 약현성당도 있다. 약초를 키우던 밭 자리에 세운 성당이라 약현(藥峴)성당이라 불렀다. 종교의 자유가 허용된 1886년(고종 23년) 이후 천주교 신자가 늘어나자 프랑스 신부 코스트(Coste, 한국이름 고의선)가 설계해 1893년에 완공했다. 명동 성당이 4대문 안의 한양 천주교 신자를 위한 예배당이었다면, 도성 밖 신자들을 위한 성소가 바로 약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