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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공책] 가려진 세계의 징후들
군수 물자를 싫어 나르던 기차를 배경으로 웨딩사진을 찍은 두 커플이 다른 장소로 이동하고 있다. 중국 베이징 798예술구. 웨딩 사진을 찍는 몇 시간 동안 예비 부부들은 유럽 중세의 공주와 왕자로 변신한다. 왕궁 생활 경험이 없기 때문인지 생전 처음 입어보는 공주 왕자 복장을 한 예비 부부들의 표정은 식은 땀을 흘리게한다. 사진가의 요구대로 애써 포즈를 잡고 표정을 잡아보지만 결과물은 항상 어색한 합성사진 분위기다. 10여년전 내 웨딩촬영의 경험도 마찬가지. 아내가 내가 사진기자라고 밝히는 바람에 사진가는 우리만큼 식은 땀을 흘렸다. 평소 잘 웃지 않는 나도 안쓰러운 사진가를 위해 왕자 연기를 펼쳐보였다. '아무려면 어때, 패키지 웨딩 상품이라 사진을 안찍을 수도 없고 광대가 되보자!' 위 사진은 중국 ..
낮 동안 퍼부었던 폭우가 그치고 물만골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도심 빌딩 불빛보다 화려하지 못하지만 황령산을 은은히 밝히는 물만골의 불빛이 따뜻하다. 부산 황령산 계곡에 자리한 동네다. 예로부터 물이 많이 나는 계곡이라 해서 이런 정겨운 이름이 붙었다. 물만골은 격동의 현대사를 지켜보며 이 땅의 숱한 민초들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 한국전쟁 때는 전국에서 몰려든 피란민들을 보듬었고, 급격한 산업화 동안에는 뿌리 뽑힌 농촌이주민들의 고향이 됐다. 부산에 큰 아파트들이 들어서면서 쫓겨난 철거민들도 물만골의 너른 품으로 찾아들었다. 물만골의 맑은 물은 외롭고 힘든 서민들의 눈물을 기꺼이 씻어줬고, 타는 목을 축이게 했다. 내일을 살아갈 힘을 보탰다. 물만골 사람들이 폭우에 유실된 하천 축대를 쌓고 있다. 주민..
서울 창경궁 후원의 연못 춘당지는 겨우내 꽁꽁 언다. 2월 하순 춘당지가 녹기 시작하면 천연기념물 제327호 원앙을 아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얼음이 녹기 시작하는 곳이 연못가이기 때문. 춘당지가 녹기 시작한 것을 어떻게 안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딘가에서 혹한의 겨울을 보낸 원앙들은 해빙된 작은 춘당지 연못에 모여 봄 단장을 한다. 비싼 망원랜즈가 없더라도 보급형 DSLR이 있다면 원앙의 모습을 예쁘게 담을 수 있다. 수컷 원앙이 암컷의 털을 고르고 있다. 사자를 비롯한 대부분의 동물들은 대게 수컷이 화려하고 멋있다. 깃털 색깔이 으뜸인 원앙도 마찬가지. 이태리 가방 만다리나 덕은 원앙의 화려한 깃털을 모티브로 디자인한 상품을 생산한다. 원앙은 영어로 mandarin duck. 이태리 가방은 mand..
교동도 어르신들이 대룡시장 황세환(75) 할아버지의 한 평 남짓한 시계수리방으로 들어가고 있다. 40여년전 모습을 간직한 대룡시장을 말해주듯 시계수리방의 괘종시계가 멈춰있다. 인천 강화군 교동도 대룡시장의 시간은 멈추어있다. ‘연지곤지 식품점’, ‘돼지네 식당’, ‘임득남 미용실’ 등 예쁜 이름의 간판을 단 상가 건물은 50여년전 그 모습 그대로다. 북한과 지척이라 민간인통제선 지역으로 묶인 탓에 교동도는 개발에 뒤쳐졌다. 한국전쟁으로 피난 온 실향민들은 고향에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 둘 섬을 떠났다. 농사를 짓던 원주민들도 교육 때문에 자식을 떠나보냈다. 빈집이 늘어나 한산한 지금의 대룡시장은 시장이라 부르기 쑥스러울 정도. 몇몇 남아 있는 상가들만이 쓸쓸히 시장을 지키고 있다. 세월의 흔..
처음엔 '인디언촌'이라 불렀다. 한국전쟁 이후 갈 곳 없는 사람들이 인왕산 아래 천막을 세웠다. 옛 사진을 볼 수 없지만, 천막촌의 모습이 인디언 마을과 비슷했단다. 인디언처럼 소리지르고 다니는 사람도 많았다는데, 이유는 알 수 없다. 서울에 몇 남지 않은 달동네 서대문구 홍제3동 주택가 마을이다. 인디언촌. 천막주거지라는 인상 때문인지 마을 사람들은 지난 1983년 마을 이름을 개명했다. 열심히 살아가는 '개미마을'로. 개미마을에는 200여가구 400여명의 주민들이 개미처럼 살고 있다. 이름을 바꾼 개미마을은 지난 2009년 새로운 옷을 갈아입었다. 관할 구청과 한 건설사가 40여년 버텨온 주택에 벽화를 그려넣었다. '빛 그린 어울림 마을'이라는 주제로 이틀동안 그렸다고한다. 개미마을 벽화를 둘러봤다...
장미 남대문 대도 꽃도매상가는 오후 3시에 문을 닫는다. 금요일을 포함한 주말은 오후 4시. 너무 일찍 문을 닫는다고? 개점 시간을 알면 그런 불평은 못할거다. 새벽 3시에 문을 열기 때문. 도매상 특성상 새벽에 문을 연다. 점심 먹고 문을 닫아도 그만이지만 오후에 찾아오는 소매 손님들을 위해 3시까지 문을 연다. 오늘(2월 13일)은 졸업 입학을 앞둔 손님들이 많아서인지 상가 운영시간을 1시간 연장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프리지어 졸업 입학 시즌을 알리는 사진 뉴스를 취재하기 위해 지난 10여년간 꽃도매상가를 종종 방문했다. 거친 시장 상인들을 상대해야하기 때문에 꽃시장 취재는 그동안 달갑지 않았다. 꽃이 예쁜지도 몰랐다. 하지만 올해는 느낌이 달랐다. 화사한 색감과 다양한 꽃잎 라인이 눈에 들어..
거친 조릿대를 엮는 손이 발갛게 부었다. 정초에 새로 장만한 조리를 복조리라 했는데, 일찍 들여놓을수록 길하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섣달 그믐날 자정이 넘으면 조리 장수가 '복조리 사려' 외치며 골목 구석을 누볐고, 아낙들은 밤을 새며 복조리 장수를 기다렸다고 한다. 복조리 장수의 진풍경을 이제 볼 수는 없지만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구메농사마을에서는 노인들이 방에 둘러 앉아 산대나무 조릿대를 쉴새 없이 엮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 복조리의 재료인 산죽이 많은 전남 화순군 송담마을 등 몇몇 마을이 복조리를 생산했는데 지금은 값싼 중국산 복조리에 밀려 명맥만 유지한다. 하지만 안성시 죽산면 구메농사마을은 국산 복조리의 대부분을 생산하며 성공한 복조리 마을로 유지돼고 있다. 복조리 장인들과 함께 만드는 복조리..
2013년 2월 1일 서울 북악산에 비가 내리고 있다. 백악에 아침 빛 찾아오면 창창한 푸른빛이 반쯤 머리 내민다. 응당 허리 아래 비도 내리겠고 내 서루도 깊게 잠길 것이다. - 사천 이병연 시화집 - 조선 영조대를 대표하는 시인 이병연(槎川 李秉淵, 1671~1751년)은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거장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년)은 죽마고우다. 노론 가문 출신의 사천 이명연과 겸재 정선은 북악산 아래 같은 동네에서 태어났다. 이병연은 정선의 북악산 그림 '백악부아암'을 보고 위와 같은 시를 읊었다. 백악白岳은 북악北岳을 말한다. 북악은 면악面岳, 공극산拱極山, 백악이라 불리기도 했다. 겸재 정선의 백악부아암 정선의 북악산 그림은 몽환적이다. 산 허리는 운무에 싸였고 산 머리는 구름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