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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공책] 가려진 세계의 징후들
아침부터 태양이 이글거렸다. 출근하는 여성들의 복장이 부러웠다. 치마에, 반바지에, 나시에, 샌달에... 야외 취재가 많은 터라 내 몸은 노동자처럼 검게 그을리고 있다. 옷을 벗으면 하얀 반팔 티셔츠를 입은 것처럼 몸뚱이만 하얗다. 서울 마포대교 아래 이글거리는 태양을 편집국장이 느꼈다. 사진부로 오더니 '오늘은 폭염이네'하며 한 마디 던지고 자리를 떠났다. 머릿속이 이글거렸다. 휴가 기간이라 일할 사람이 별로 없다. 그리고 하필 나만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데스크가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더위 먹지 않게, 쉬엄쉬엄 해." '편집국장이 얘기했는데, 어떻게 쉬엄쉬엄 합니까?'라고 나오는 말을 삼켰다. 벌렁대는 가슴을 쓸어안고 썬크림을 덕지덕지 발랐다. 어디로 가야 1면에 올릴만한 장면이 나올까? 서울 여..
정전협정 62주년기념식이 열리는 경기도 파주시 판문점을 27일 다녀왔다. 정전협정의 정식 명칭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사령관 및 중공인민지원군 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이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클라크(Mark Wayne Clark)와 북한군 사령관 김일성, 중공인민지원군 펑더화이 사령관이 영문, 한글, 한문으로 작성했다. 정전 협정에는 당사국인 북한은 있었지만 한국은 없었다. 국제 관례상 정전협정이 이렇게 오랫동안 지속되는 있는 경우는 한반도다. 그래서 정전협정 대신 평화협정을 체결해야한다는 공감대가 있다. 북한은 이미 1974년부터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했다. 그러나 정전협정 서명에 참가하지 않은 한국과..
강원도에 정동진이 있다면, 전라남도에는 정남진이 있다. 드라마 모래시계의 유명세로 정동진은 그저 아름다운 해변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정남진의 뜻을 알아보니 그 지명이 한반도의 위치를 표시하는 지명이란걸 알게됐다. 서울 도로의 시작점을 표시한 광화문 도로원표를 중심으로 정동쪽에 있는게 정동진이고, 정남쪽에 있는 곳이 정남진이다. 정남진은 전라남도 장흥이다. 7월 초입에 정남진 장흥이 숲과 바다를 둘러봤다. 참고로 장흥의 현지 발음은 '자흥'이다. 장흥 동남쪽에 여인 치마자락같은 산세를 갖고 있는 억불산 편백나무 숲이다. 다른 나무보다 다섯배는 피톤치드를 내뿜는다는 편백나무 숲에서 한 관광객이 산림욕을 즐기고 있다. 수령 40년이 넘는 편백나무가 하늘로 솟구쳐 있는 '우드랜드'는 잘 정비된 데크 산책길도 있어..
제주도 사투리는 추측불허다. 봄에 걸었던 전남 여수 금오도 '비렁길'은 벼랑길의 전라도 말이다. 해안 절벽을 따라 이어진 산책로를 걷다 '비렁길'의 '비렁'은 '벼랑'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마을 주민에게 물어보니 추측이 맞았다. 하지만 제주도 방언은 좀처럼 추측하기 어렵다. 혼자옵서예! 이정도는 유명해서 제주 인삿말이라고 알고 있겠지만, '무신 거옌 고람 신디 몰르쿠게?' 정도로 문장이 되버리면 제주말은 완전 해석불가하다. 뭐라고 말하는지 모르겠지요?라는 뜻이다. 곶자왈. 어떤 것을 지칭하는 제주말이라고 생각되지만 힌트가 전혀 없다. 혹시 바닷가에 돌출된 육지를 가리키는 '곶'처럼 바다와 관련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완전히 반대다. '곶자왈'은 나무와 덩굴 따위가 어수선하게 뒤엉킨 숲을 말한다. 학술적으..
딸 아이와 놀멍 쉬멍 올레길을 걸었다. 초등학교 2학년이라 한 코스를 완주할 수 있을까 걱정됐지만 놀거리가 있는 올레길이라 그야말로 놀멍 쉬멍 끝까지 걸었다. 구간 마다 색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올레5코스다. 남원 큰엉 해안경승지 서귀포시 남원읍 남원포구에서 시작하는 5코스는 위미항을 지나 쇠소깍(소가 누워있는 모양의 연못)까지 14.4km 거리다. 남원읍의 작은 마을들과 포구들을 지나기 때문에 여자들이 걱정하는 화장실도 자주 나온다. 남원포구 해안길을 1km 정도 지나면 화산활동으로 형성된 제주 특유의 해안절벽을 만날 수 있는데, '큰엉 해안경승지'라 불린다.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큰 바윗덩어리로 이루어진 언덕이라고 해서 '큰엉'이다. 한반도 숲 터널 1.5km에 이르는 큰엉 올레길에서는 숨은그림찾기를..
칠족령에서 바라본 동강이 물돌이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 강 중에서 가장 구불구불한 물줄기를 갖고 있는 강은? 아마 동강일 것이다. 기암절벽을 이룬 강원도의 산세를 굽이굽이 흘러내리는 모습이 뱀이 기어가는 모습이다. 또아리를 튼다. 오대산에서 발원한 물길은 정선군과 영월군을 지나 남한강 상류로 굽이쳐 흐른다. 정선의 목재를 뗏목으로 엮어 서울까지 운반했다는 옛날 얘기도 있다. 드라이브로 말하면 최고의 드리프트 코스다. 평창에서 발원한 동강 물줄기가 영월을 통과하고 있다. 한때 댐 건설 계획이 추진됐는데, 동강이 정말 동강날 판이었다. 일부 주민들과 환경단체들이 반대해 지난 2000년 동강댐 계획은 백지화됐다. 당시 이 지역을 취재했던 선배 기자와 동행했다. 길도 많이 좋아지고 숙박업소, 래프팅업체도 많이 ..
제주도의 신령한 산이 한라산이라면, 숲은 사려니숲이다. 사려니는 '살안이' 혹은 '솔안이'로 불리는데 '살', '솔'은 신령한 곳을 말한다.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 사려니오름에서 물찾오름을 거쳐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 비자림로까지 이어지는 15km의 숲길은, 거짓말을 약간 더해 태고의 신비함을 갖추고 있다. 사려니숲길은 비자림로에서 붉은오름까지 이어지는 10km 구간만 걸을 수 있다. 지난 2002년 지정된 제주 생물권보전지역에 위치한 사려니숲의 생물다양성 보존을 위해서다. 하지만 1년에 1번 2주동안 사려니오름까지 이어지는 구간과 성판악 탐방로를 개방하는데, 사려니숲 에코힐링 행사 기간이다. 에코힐링 행사 기간에는 출입금지된 사려니오름, 물찾오름, 붉은오름도 개방된다. 물찾오름은 앞으로 3년동안 출입이 ..
걷다보면 사소한 것들이 감동을 줍니다. 목적지를 향해 앞만 보며 걷지말고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 주위에는 제법 재밌는 장면들이 펼쳐집니다. 회사와 가까운 카페에서 인터뷰 약속이 잡혔습니다. 취재기자가 걸어서 가자고 합니다. 안될 일입니다. 사진기자는 삼보 이상이면 차를 타야한다는 불문율이 있습니다. 우수개 소리가 아닙니다. 무거운 장비를 짊어지고 다니다 허리를 다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기 때문이죠. 걸어서 가자는 취재기자의 제안에 거절하지 않고 다소 가벼운 카메라 장비를 들고 걸었습니다. 오래 걸은 것도 아닌데 많은 것들이 보였습니다. 아카시아꽃 카페트가 깔린 흙길, 그루터기 화분, 나뭇잎 떨어진 자갈길, 구멍 뚫린 느티나무... 가끔, 가벼운 장비를 들고 걸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