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공책] 가려진 세계의 징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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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길의 사진공책

동백꽃 필 무렵은 겨울 (하)

김창길 2019. 12. 30. 19:18

사라 베르나르 주연 <동백꽃 여인> 포스터, 1896 / 알폰스 무하

 

겨울에 피는 동백꽃 여인이 아니었다. 길을 잃은 여자도.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먹고 유년의 세계로 돌아간 마르셀 프루스트가 만단 배우 사라 베르나르는 금지된 욕망에 사로잡힌 여인 페드르이었다. 극작가 장 라신이 쓴 비극의 제목이자 주인공인 페드르는 남편과 전처의 아들 사이에서 괴로워하다 독약을 삼킨다. 프루스트의 아버지는 유년의 그에게 페드르를 연기한 사라 베르나르에 대한 신문기사를 소개해준다.

 

"<페드르> 공연은 예술계와 비평계 대표 인사들이 자리한 가운데 열광하는 관객들 앞에서 이루어졌으며, 페드르 역을 연기한 마담 베르마(사라 베르나르)에게는 그녀의 명예로운 경력에서도 보기 드문 찬란한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 민음사. 101)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반복 등장하는 베르나르는 고대 그리스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인들에 자주 비유된다. 석양의 요정 '헤스페리데스', 왕의 신전을 모시는 여인상 '카리아티드', 아르카익기(기원전 600-550년경)의 처녀상 '코라이'……. 무대의 여신이었던 사라 베르나르는 영국은 물론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도 순회공연을 펼쳤다.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세상에는 다섯 종류의 여배우가 있다. 형편없는 배우, 괜찮은 배우, 연기를 잘하는 배우, 대단한 배우, 그리고 사라 베르나르가 있다."

 

사라 베르나르는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러 일으켰다. 영국의 '오스카 와일드'는 그녀가 연기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희곡 '살로메'를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썼고, 프랑스 극작가 '빅토리앵 사르두'도 그녀를 위한 희곡 '라 토스카'를 썼다.

 

 

사라 베르나르, 1864. / 나다르

 

 

귀스타브 도레 등의 화가들이 사라 베르나르을 그렸지만 그녀의 개성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은 연극 포스터였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인 18941226, 베르나르는 르메르시에 인쇄소에 전화를 걸었다. 빅토리앵 사르두의 '지스몽다' 홍보 포스터를 새로 제작해달라는 주문이었다. 하지만 인쇄소에는 포스터를 그리고 디자인할 정규직 직원들은 모두 크리스마스 휴가를 떠난 상태였다. 곤란했지만 인쇄소는 연휴동안 인쇄소에서 일하기로 한 무명의 화가에게 일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체코 출신 화가 '알폰스 무하'.

 

무하의 포스터는 파격적이었다. 실사 크기의 기다란 화폭, 선적이고 장식적인 문양, 비잔틴 양식의 이국적인 느낌, 독특한 서체로 쓰인 베르나르의 이름이 그녀 머리 뒤에서 후광처럼 걸려 있다. 배경이 된 동방정교회의 십자가는 베르나르를 마리아같은 성녀로 탈바꿈시켰다.

 

무하의 지스몽다 포스터는 베르나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베르나르는 무하에게 5년 동안 자신의 연극 포스터를 그려달라고 청했다. 파리 시민들도 그의 포스터에 감탄했다. 하룻밤이 지나면 벽에 붙은 포스터가 사라졌다. 웃돈을 주고 거래됐다고도 한다. 이국적이고 새로운 느낌의 화풍은 '무하 스타일'로 불렸고, 광고와 삽화 등 여러 분야에 영향을 끼쳤다. 새롭다는 것을 강조하며 '아르누보(Art Nouveau, 새로운 예술)'라고도 했다.

 

사라 베르나르는 평생 무대를 떠나지 않았다. 55세에는 성별을 넘어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연기했고, 영화에도 출현했다. 70세에는 한쪽 다리를 잃었지만 다시 무대에 올랐다. 78세의 나이에 리허설을 하다 쓰러졌지만, 다시 일어섰다. 1년 후에 다시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프랑스 정부는 그녀를 국장으로 예우했다. 추도회에는 영국 왕도 참석했다. 떠나는 그녀를 3만 여명의 파리 시민이 애도했다. 신이 내린 배우라고 찬사를 받았던 사라 베르나르는 그렇게 하늘로 올라갔다.

 

 

사라 베르나르 주연 <지스몽다> 포스터, 1894. / 알폰스 무하